2010년 3월 31일 수요일

2010년 3월 31일 수요일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님을 뵈었다. 공감 사무실에 처음 가 보았다. 꽤 횡설수설했지만, 나 자신이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러 갔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러가지 의미에서 각오를 다질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녁에는 문지문화원 강의를 하고 나서 동진님과 데이트를 했다. 사이 1층에 내려갔는데 와 있어서 깜짝 놀랐다. 함께 홍대 앞 [멘야요시]라는 라멘집에 갔는데, 아주 맛있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먹어 본 일본라멘 베스트 2에 들어갈 정도로 훌륭했다. 자주 갈 것 같다. 학교 바로 앞에도 있다고 하니 꼭 가 볼 생각이다.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어머니께서 집에 오셔서 맛있는 오무라이스를 해 주셨다. 그 덕분에 점심과 저녁을 제대로 먹었더니 한결 힘이 났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미역국도, "너에겐 요오드와 칼륨이 필요해!"라는 말씀을 듣고 음, 그렇군, 하고 생각해서 열심히 먹었다.

2010년 3월 28일 일요일

2010년 3월 28일 일요일

귀찮은 파이 반죽을 아무리 길어도 180초 이내에 완성해 준다는 필립스 푸드 프로세서를 사 놓고, 어서 테스트해 보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 먹으러 나가기 전에 잠깐 한 번 돌려 봤는데, 마치 마법처럼 파이반죽이 완성되어서 감동했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아버지의 결혼기념 선물인 귀여운 미니 타르트와 각종 키쉬 재료를 바리바리 싸들고 아우님이 놀러 왔다. 내가 어제 밤에 만든 길다란 애플파이를 먹고 반죽 만들기에 돌입. 홈쇼핑 광고 영상 그대로인 그 성능에 감탄하면서 반죽을 마구 만들었다. 피망, 햄, 브로콜리, 토마토 등을 넣은 키쉬를 하나 만들고, 판 벌린 김에 반죽을 잔뜩 만들자 하여, 아우님이 수퍼에 가서 버터를 세 통 더 사 왔다. 집에 있던 박력분을 다 썼다. 그 다음에는 사과를 졸여서 꼬마 애플파이를 만들었다. 반죽을 주물럭거리며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한밤중이 되었다.

굉장히 즐거웠다. 시들어가던 사과를 두 알 처리(?)한 점도 뿌듯했다.

2010년 3월 27일 토요일

2010년 3월 27일 토요일

결혼기념일이었다. 멋진 결혼기념일 선물을 받았다. 저녁은 압구정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트라토리아 몰토]에서 먹었다. 아주 맛있었고, 파스타 코스도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추웠다.

2010년 3월 26일 금요일

2010년 3월 26일 금요일

매우 바쁜 하루였다.

학교에서 법조윤리 강의를 듣고 센터에 갔다가 집에 잠시 들러 그새 올라온 세미나 자료를 출력해 손보다가 학교에 가서 공익인권법학회 발제를 했다. 시간이 없어서 택시 안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차 안에서 자판을 두드리기는 처음이다.

세미나 발제를 준비하고 오랜만에 학회 모임에 참여하면서 법학도들이 말하는 법적으로 엄밀한 사고란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건조함이 인상 깊었다. 나에게 별로 맞지 않는 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 조금 슬펐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연이 닿은 것만으로도 이번 세미나는 의미가 있었다. 내키지 않을 때에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내가 나를 드러내야 가능한 만남과 관계가 있다. 또한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제가 낸 책을 보시면 돼요.'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어 기뻤다. 그렇게 일해 와서 다행이다.

밤에는 홍대 앞에서 동진님을 만나 [심스 타파스]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즐거웠다. 겨울 내내 잘 하고 다니던 토끼털 목도리를 잃어버린 줄 알고 무척 속상해 했으나, 자기 전에 씻으러 들어간 욕실에서 발견했다. 수건 걸이에 끼워 놨더라. 센터에서 돌아와 잠시 양치질 하는 사이에 빼 놓고 깜박 했던 모양이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점심 때 연세 한국어학당 학생인 마사미 씨를 처음 만났다. 학교에서 구한 언어교환 파트너로 재일교포 3세이다. 함께 [라 본느 타르트]라는 타르트집에 갔는데, 차도 맛있고 타르트도 맛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시간대가 어중간했던 덕분인지, 시끄럽지 않아서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갔다.

저녁에는 내일 공익인권법학회 발제를 위해 현주언니, 수진과 만난다.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이명현 님과 교내에서 만나 LORD SANDWICH에서 점심을 먹었다. 독특한 천문학회 가방을 선물로 받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학교의 종교적 보수화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아주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다.

문지문화원 봄 학기가 개강했다. 이번에는 수강생이 많지 않아서,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해 보려고 한다. 이 강좌를 통해 과학소설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나서 참 즐거웠다. 마지막 학기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내가 즐거운 만큼 오시는 분들도 즐거우시면 좋겠다.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오전에 수유너머의 유선님, 하지메님과 영등포 교도소로 현민 면회를 다녀왔다.

밤에는 너무 힘들어서 기진맥진했다. 지금의 삶에 대해서 이대로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 실천하지 못할 일을 두고 허언을 하는 것이 꼴불견인 줄은 알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

2010년 3월 20일 토요일

2010년 3월 20일 토요일

아침에 철학과에서 강진호 선생님의 언어철학 수업을 듣는 꿈을 꾸었다. 교실에 앉아서 이렇게 재미있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니 하고 행복해하면서 강의를 듣다가 깼다. 촘스키와 비트겐슈타인이 나왔는데, 물론 내 꿈이니 수업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째서 강진호 선생님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침 꿈이다 보니 마치 정말 수업을 들은 것 같아서 그 충만감이 오전 내내 남아 있었다.

저녁에는 신촌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에서 서울대 백신고 동문회를 했다. 09, 10학번들을 만났고, 오랜만에 형기오빠도 뵈었다. 아이가 벌써 네 살이라고 한다.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법조윤리 시간에 눈물 콧물 흘리면서 [인물 현대사] 조영래 변호사 편을 보고, 센터에 갔다. 남편이 과일 장사를 하는 J씨가 맛있는 바나나를 가져와서 냠냠 먹었다. 수업 후에도 바나나를 하나 더 먹었는데, 그 뒤에 컵라면을 먹어서 속이 좀 거북해졌다. S씨가 내 귀걸이를 보고 예쁘다고 하자 G씨도 그 생각 했는데 말을 못 했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가 아니, 안 예쁘니까 여기 버리고 가시라는 농담으로 넘어가서 한참 웃었다.

타 센터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북이 나와서 한 권 받아 왔다. 우리 센터에 오시는 분들이 참여하신 프로젝트라 낯익은 얼굴이 많아 재미있게 보았다. 다만 한국어를 이미 꽤 잘 하시는 분들이 참여한 것이 한눈에 보여 안타까웠다. 한국어를 못 하는 분들은 애당초 정보에 접근할 수가 없다. 한국의 결혼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은 대체로 저소득층에서 이루어진다. 이리저리 얽힌 주택가에 사는 경우 길을 잃을까봐 못 나와 저절로 갇히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다른 센터에 있을 때도 영어권이나 한자권에서 오지 않은 어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가는 일이 큰 문제였다. 수술할 때가 지난 듯한 익상편으로 고생 중인 E씨는 남편이 무직인데, 오늘 안과에 가려고 했으나 보험증을 가져 간 남편이 제때 오지 않아 결국 못 갔다고 했다. G씨도 아직 병원에 가지 못했다. 아파서 병원에 간다고 해도, 의사의 설명을 이해할 만큼 한국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까지 가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과 함께 생존하기 위해 몸 쓰는 허드렛일이라도 구하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얼마나 큰 벽을 마주해야 할까. 그런 상황에서도 센터에 오고, 더 나쁜 상황에 있던 친구를 찾아내 데려오기도 한다. 대체 그것은 얼마나 큰 용기이고 도전일까. 가족이 화목하고 아이들이 건강하며 먹고 살 만 한 분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기란 여전히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돈을 벌고 아이를 키우고 시부모를 봉양하고 병원에 가는 사이에 공부를 한다. 농담을 한다. 짬을 내어 운동을 한다. 나는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삶에 대한 용기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러니 내가 가진 것이 많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타인의 결핍은 내 풍요로움의 가늠자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타인의 생에 잣대로 쓸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

나는 그저, 조금 체한 듯한 배를 문지르며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고개를 들어 세상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생각했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상준님, 명현님, 창규님, 맹성렬님, 고드 셀라와 홍대 앞 막걸리집 [검정고무신]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다. 술집에서 만난다고 해서 어떨까 싶었으나, 우리나라에서 UFO에 관해 가장 전문가라는 맹성렬 님이 나오신다는 말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혹해서 갔다.

전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UFO에 관해서는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다더라-정도 이상의 이야기는 없었다. 과학자이시기도 한 만큼, 좀 더 물증이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했지만 공군이 팀 스피리트 훈련을 하다가 목포 해상 위에서 빛나는 물체를 보았다고 증언했다는 말은, 글쎄, 그 증인이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과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목격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은 믿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외계 생명체가 보낸 어떤 비행물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오히려 특정한 스트레스 환경에서의 집단 환각이나, 아직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외계생명체 UFO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지구중심적'이라는 SETI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외계 생명체가 보낸 UFO는 있다고 생각하는 맹성렬 님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믿지 않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 증언은 중세나 그 이전부터 있는 마리아님을 만났다든가 하는 이야기와 구조가 동일하다고 보고 계셨다. 또한 UFO나 외계인에 관한 담론의 종교화를 경계하고 계신 점은 인상적이었다.

오히려 흥미로웠던 것은 요즈음 막걸리 붐을 타고, 전북도가 막걸리의 맛을 감각 표준화 하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맹성렬 님의 본 전공 이야기였다. 센서 연구를 통한 맛의 표준화라니! 또한 SETI 과학자이신 명현님의 최근 외계 생명체 연구에 관한 새소식은 아주 재미있었다. 최근 외계 생명체 연구자들은 상당히 고양되어 있고, 한동안 저조했던 NASA에서도 예산을 증액하고 있다고 한다. SETI쪽에서 잡고 있는 D-Day는 2018년이다. 가장 외계 생명체의 발견 가능성이 높은 곳은 물론 화성으로, 화성에 박테리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화산활동이 없는 화성의 대기에 그만한 메탄 가스가 존재하는 이유를 달리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강력한 근거이다. 2018년인 이유는 2016년에 발사될 예정인 새 화성탐사선과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인류는 화성의 흙을 20cm정도까지 파내려갔는데, 2016년의 화성탐사선은 22m까지 팔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탐사선이 화성에 도착해 작업 결과가 나오는 것이 2018년이라니, 이제 10년도 남지 않았다. 듣고만 있어도 두근두근했다.

그 다음의 중요한 해는 2025년으로 전파망원경 탐사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관측된 미확인 전파 신호는 5,000여개이다. 전파 신호들 중에서 유의미한 것을 골라내기 위해서는 전파 신호의 규칙성이 중요한데, 인류의 전파망원경 역사가 오래지 않아서 아직까지 규칙성을 밝힐 정도의 DB가 쌓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건설중인 SETI전용 전파망원경들이 건설되어 계속해서 신호를 분석하기 시작하면, 2025년에는 신호의 유의미성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단다.

자카르타에 여행을 다녀온 고드 셀라에게서도 이 자리에서 들을 줄 몰랐던 소식을 들었다. 포스코 건설이 지금 인도네시아에 새 공장을 건설하는데, 그 계획이 지역 주민들의 거주지와 농토를 빼앗을 뿐 아니라 천연림까지 밀어버리는 것이라서 반대가 매우 거세다고 한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해외 언론에도 보도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아마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고 했는데, 검색해 보니 역시나, 한국어 검색으로는 외화를 잔뜩 벌어 올 예정이라는 식의 경제신문 기사나 포스코의 녹색경영 어쩌고밖에 뜨지 않는다. 영어로 검색하니 바로 나온다. 

2010년 3월 16일 화요일

2010년 3월 16일 화요일

수업이 있는 평일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학교에 있으면 무기력해지기 쉽기 때문에, 활력을 줄 만한 일을 일정에 넣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쉽지 않다. 그냥 멍하니 앉아서 교과서 보고 필기 하고 딴 생각 좀 하다 보면 낮 시간이 다 간다. 학교는 젖은 종이처럼 우울하고 쓸쓸하다. 그나마 올해는 수강신청을 한 덕분에 오전 수업이 없고, 그럭저럭 재미도 있다. 월요일 오후 5시~7시 수업이 국제인권법이 아니었다면 내가 과연 그 시간까지 학교에 붙어 있었을까.

수업 후에 현주언니, 수진과 세미나 발제 준비 토론을 했다. 시민적 결합을 주제로 잡기로 했다. 토요일에 출장을 갔던 동진님이 돌아왔다. BBQ치킨의 신작 바삭칸 치킨을 먹어 보았다. 동진님과 놀았을 뿐인데 금세 잘 시간이 되었다. 하루 잘 간다.

목이 아프고 답답했는데 황사였던 모양이다.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 화이트데이

지난 주 내내 골골 앓는 나를 걱정한 어머니께서 저녁으로 카레를 만들어 주셨다. 맛있는 카레와 맛있는 딸기, 샐러드를 배불리 먹었다. 잠시 후에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태우러 오셨다. 생수와 아우님에게 부탁했던 초등교과서, 결혼기념일 선물 등을 이것저것 가져 오셨다. 짐이 많으니 잠깐 나오라는 전화를 받고 1층으로 내려가 쇼핑백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생수 열두 병을 발치에 놓고 허리를 편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 그새 더 미남되셨네요."
내가 씩 웃자, 아버지도 씩 웃으시더니 주머니에서 동그란 과일사탕 캔을 꺼내신다. 우왕, 고맙습니다- 하고 받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관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가 내가 자랑스레 치켜든 사탕 캔을 보더니 "당신은 나만 챙기면 돼요. 얜 동진이가 챙기겠지." 하고 장난스레 눈을 흘기며 짐을 받아드신다.

아버지도 오신 김에 카레를 드시고 가셨다. 어머니가 구두를 신으며 "어휴, 그냥 확 납치해 가고 싶다. 데리고 가 버릴까~" 하신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음핫핫핫, 점점 더 인기짱인 나!" 하고 기분 좋게 웃으며 문앞에서 부모님을 배웅했지만, 사실 조금은 납치당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컨디션은 여전히 좋지 않았으나, 잘 먹어서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지정사에 나갔다. 앞 모임에 두 번 못 나갔었기 때문에 상훈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을 뵙고 싶기도 했다. 서울대입구역 봉천중앙시장 근처에 있는 [경성양육관]에서 양꼬치를 먹었다. 참석자는 까리용님, 상훈님, 아스님, 상현님, scifi님, 인수오빠, 나. 양꼬치를 실컷 먹었다. 꼬치로 기록이 남아 세어 봤더니 나 혼자 1.7인분 먹었더라!

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 근처에 있는 술집에 가서 룸을 차지하고 무슨 700ml? 세트를 시켰다. 나는 오렌지 어쩌고 하는 무알콜 칵테일에 도전해 보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아주 다른, 평범한 음료가 나와 낙담했다. 여기에서 근처에 사시는 sabbath님이 합류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것저것 나왔으나 불편하기도 했다.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한 사람만 입장이 달라 자신이 속한 집단을 변호/변명/비판/대변해야 하는 상황은 즐겁지 않다. 근본적인 정체감, 세계관과 직결되는 '신앙'이 그 주제일 경우에는 더 불편하다. 그렇다고 모임에서 누구 한 사람만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정당의 지지자인 경우 무조건 그 주제에 관해 침묵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력이 다해 일찍 일어났다. 왕복 택시를 타는 호사를 부리며 일용할 양식이 없는 집에서 나갔다 왔는데, 좋은 분들과 맛있게 잘 먹었으니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현민의 구속일이었다.

수강신청변경기간에 법조윤리를 넣었기 때문에, 1교시에 맞추어 학교에 갔다. 버스를 탈까(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환승할 필요가 없고 앉아 갈 수 있다) 지하철을 탈까(두 번 환승해야 하지만 출퇴근 시간에는 버스보다 빠르다) 고민하다가 아직은 괜찮을 것 같아 버스를 탔는데, 정말 아슬아슬하게 들어갔다. 지정좌석제인데 내 자리는 맨 앞이다. 올해의 운은 어제로 다한 모양이다.

그래도 가나다 순으로 앉아서, 지난 학기에 가까이 앉았던 앞번호 기봉오빠, 뒷번호 어연씨와 이번 학기 들어 처음으로 얼굴을 보고 인사할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기봉오빠는 참 멋진 분이다. 성실하고 겸손하고,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 말하기를 할 줄 아신다고 할까. 가까이서 자세히 보고 배우고 싶은 부분이다.

법조윤리 시간에는 [뉴스 후] 비디오를 보고 변호사의 윤리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2시간 연강인데 쉬지 않고 이어져서 나중에는 무척 힘들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버스를 타고 센터로 갔다. 다행히 현대백화점 앞에서 센터 근처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더라. 바람이 많이 불어 몹시 추웠는데, 센터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평소보다 더 복작복작해서 사람 열기로 따뜻했다. 어제 선물로 들어왔다는 롤케이크를 나누어 먹고 있기에, 얼른 끼어들어서 허겁지겁 먹었다. 필리핀에서 오신 두 분이 새로 오전 수업에 참여하신다고 한다.

오늘의 읽기 수업은 잘 되지 못한 것 같다. 예문을 하나 잘못 들었던 것 같아서 계속 신경이 쓰인다. E씨와 한국어능력시험 3급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 시험 너무 어렵다! 한국인에게 풀라고 해도 만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수준이다. E씨가 J씨의 아들을 보며 "저도 아기 있고 싶어요."라고 했다. E씨는 아침에는 빵집 청소를 하고 저녁에는 식당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 시급은 5,000원이다. 오전에 새로 온 필리핀 출신 W씨는 한국에 온지 삼 년이고 아이도 둘 있지만, 남편이 집에서 내보내주지 않아 한국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한국어도 텔레비전을 통해서밖에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글 자모 쓰기도 잘 안 되는 상태. 게다가 집에서 잠시만 나가도 남편이 전화를 해서 어디에서 뭐 하느냐고 화를 낸단다. 남편이 센터에도 여기 뭐냐고 불쑥 찾아왔다가, 대표님을 보고 돌아갔던 모양이다. 국적과 영주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이가 둘 있고 센터에도 자주 오시는 G씨가 아직 국적도 영주권도 없는 외국인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조금 놀랐다. 아이 나이를 생각하면 결혼한지 오 년이 넘었을 텐데, 왜 영주권조차 없는지는 묻지 못했다. 그보다도 당장은 G씨의 허리 통증이 걱정이다. 몇 년 동안 계속 아이를 업고 다녀서 이제는 조금만 허리를 써도 누워서 쉬어야 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지만 아직 정형외과에 가지 못했다. 병원에 가서 디스크인지, 어느 정도인지 검사를 받아 보았으면 좋겠는데......활동 외 시간에 근처 병원에 함께 가고 싶은데 그렇게까지 개입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서 망설이고 있다.  

수업을 한 다음에는 집으로 급히 가서 옷을 갈아입고 노트북을 놓아 둔 다음, 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인스턴트 떡국을 먹었다. 그리고 서부지검으로 갔다. 오늘은 동기 신행, 02학번 수영 씨, 날맹 씨, 나,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계신 분(성함을 미처 여쭙지 못했다) 다섯이 현민을 배웅했다. 5시 40분까지 출두라 근처 뚜레주르에서 커피와 빵을 먹고 (먹이고?) 45분쯤 지검으로 갔다. 함께 간 사람은 올라가지 못하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 지난 주에 그냥 돌아왔을 때는 얼떨떨했는데, 막상 이렇게 가는 것을 보니 정리할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싶었다. 웃으면서 갔고, 웃으면서 보냈다. 호송차가 나가는 것을 보려고 지검 앞에서 벌벌 떨면서 기다렸는데, 여섯 시 좀 넘어서 커다란 버스가 한 대 나갔다. 문제는 완전히 새까매서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점. 9층까지 갔다가 이렇게 빨리 나오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에서 밍기적거리면서 더 기다렸다. 호송차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도주우려가 없는 양심범의 경우에는 퇴근하는 검사 승용차를 타고 감옥에 가는 경우까지도 있어서 가늠하기 어렵다고 한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결국 수영 씨가 이미 갔는지 알아보겠다며 검찰청 1층으로 들어갔다. 한참 있다 나와 "신분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하고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아까 그 호송차로 간 것이 맞다고 한다.

나는 신촌 쪽으로 갈 일이 있다는 날맹 씨와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 날맹 씨도 병역거부자로, 현민이 나오기 전에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에 현민과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면회를 제외하면 몇 년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다. 신촌에 있는 비폭력 대화 센터에서 열리는 비폭력 대화 연습모임에 가는 길이란다. 비폭력 대화를 배우는 곳이 있다니 이번에 처음 알았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대를 공격하지 않고 공감하는 말하기를 하는 법을 배우는 곳으로 상담가나 아이들을 많이 대하는 교사 같은 분들이 찾아오신다고 한다. 입문 반은 한번에 세 시간씩 해서 6주 코스. 날맹 씨는 코스를 다 들은 사람들끼리 만나서 연습하는 단계에 있단다.

추운데 너무 오래 떨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공익인권법 학회 모임 장소인 강의실에 가 보니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준성에게 전화하니 조금 전에 나와서 밥 먹으러 가는 길이란다. 춥고 힘들었으나 고기 먹겠다고 다시 학교 밖까지 꾸역꾸역 걸어갔다.

고기집에 도착해 보니 딱 고기를 받아서 굽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좋은 타이밍이다. 개강하고 처음으로 만난 동기 분들도 꽤 있었다. 2기 분들을 본 것도 물론 처음. 뒤늦게 끼어든 터라 누가 누구인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조금 들뜬 분위기가 즐거웠다. 일 년 버텼다는 실감도 났다. 고기를 잔뜩 먹었고, 고기 먹은 기세로 27일 세미나 발제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현주언니와 수진이 한다고 해서 좋은 팀이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공감에서 인턴하며 성소수자 인권 사건을 맡았던 수진에게, 원래 정한 주제인 '난민' 말고 '성소수자'로 발제를 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해 보았다. 

2차를 갈까 집으로 갈까 망설이던 차에 퇴근길인 동진님에게서 시부모님이 잠깐 들르신다는 문자가 와서 집으로 왔다. 고기 냄새가 잔뜩 밴 옷을 벗고 샤워부터 했다. 시부모님은 동진님 몸보신 약만 주고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바로 돌아가셨다. 모처럼 오셨는데.

아슬아슬한 컨디션으로 이렇게 무리를 한 끝에, 밤에는 다시 목이 아파 끙끙 앓기 시작했다.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공강 시간에 보라님과 만났다. 이대 후문 쪽으로 갔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 정장구두를 신은 보라님이 한참을 둘러 가느라 고생하셨다. 바로 어제 왕복했던 길이라 자신이 있었는데 우쭐했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20세기에 학교를 떠나 21세기에 돌아온 보라님의 인도를 받아 간신히 LORD Sandwich라는 맛있는 샌드위치/피자 카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거의 백인들만 전공하는 폴란드, 러시아 문학을 오랫동안 해외에서 공부하신 보라님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미국에서 조교 시절을 포함해 10년 동안 강의를 했는데, 그 10년 내내 유색인종인 학생이 단 두 명 밖에 없었단다. 그나마도 한 명은 도중에 그만두어서, 결국 한 수업을 끝까지 함께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요전에 보미가 집에 놀러 왔을 때, 맡고 있는 학부생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과(사회복지)는 흑인이나 아시아계가 많다고 했던 것과 비교되었다. 또 폴란드에 있을 때는 10개월 동안 수도 없이 전차를 탔는데 언제나 전차에 동양인이 보라님 한 명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같은 칸에 베트남 아주머니가 탄 것을 처음으로 보았는데, 그 때, 나는 일단 유학중이고 돌아갈 집이 있지만 저 분은 평생 이렇게 이방인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단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폴란드에는 베트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 길고 오랜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이란 어떤 것일까?

그 외에도 - 여기에서 전공 관련 서적을 구입하기가 너무 힘들어 책을 사러 블라디보스토크에 갈까 생각중인데,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배로 9시간이 걸리고 비용은 1등석은 80만원 정도, 2등석은 4,50만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예상보다 시간이 적게 걸리고 비용도 저렴해서 놀랐다. 다만 러시아는 봄에 대체로 치안이 좋지 않은데, 4월 20일 히틀러 생일 때문이란다. 스킨헤드의 경우 외국인 혐오 범죄를 저지르기는 해도 나름대로 내부 규율 같은 것이 있어서 그 행동 패턴을 알면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하지만(예를 들어 모이는 장소가 있고, 여자보다 남자 유색인종을 공격한다고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훌리건들의 범죄는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다고 한다. 또 폴란드는 남한보다 북한과 오랫동안 친밀하게 수교해 왔기 때문에, 양측 대사관이 모두 있는 바르샤바에서는 괜찮지만 보라님이 계셨던 도시처럼 북한은 대사관이 있고 남한은 문화관(?) 같은 것만 있는 곳에서 교통사고가 나거나 하면, 남한 사람의 신병을 북한 대사관으로 잘못 인도하는 경우가 생긴다. 여권을 갖고 있어도 영문 국명까지 비슷하기 때문에 의식이 있어서 남쪽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경우 실종되기도 한다니 (북측에서는 일단 남한 사람이 손에 들어오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려고 한단다) 무서운 현실이다. SF 팬으로 유명한 주한체코대사님의 이야기에는 구체제에 대한 보헤미안적 로망이 듬뿍 담겨 있어서, 다음에 꼭 대사님을 직접 만나서 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출판사나 편집자, 이주, 수업 등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세 시 반 쯤 헤어졌다. 나는 국제법과 국제인권법 수업을 듣고 집에 왔다. 보라님 덕분에 알찬 하루였다.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배명훈님, 이명현 박사님과 만났다. 한시 반 약속이라 수업 끝나고 바로 갔는데, 점심을 들지 않은 사람이 나 뿐이었다. 이명현 박사님은 조경철 박사님의 장지에 갔다가 검은 리본을 단 채 바로 오셨다. 파주 쪽인가? 이북이 보이는 곳이 장지였다고 한다. 조경철 박사님이 이북 출신인 줄 이제 알았다. 그 묘지에는 평안도, 함경도 등 도별로 장지가 마련되어 있고 북녘이 보이게 묘를 만들어 장사를 지낸다고 한다. 장지는 북에도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산이 보이는 자리였단다.

두 분과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다. 꽤 신도 나서, 역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지난 2주 동안 병이 나도록 고민했던 UW 건에는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후의 국제법 시간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만든 (국내 미방영) 북한 주민 취재 프로그램을 10분 정도 보았다. 위대하신 장군님과 수령님을 찬양하며 만세를 부르고 부르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 헛 하고 웃었다. 황당해서였겠지만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내 눈에는 다른 자리에서 보았던 개신교회의 찬양(?) 장면과 똑같았다. 북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뭄, 홍수, 빈곤, 죽음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생존이 워낙 절박하니 독재는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처럼 느껴질 정도다. 북한의 붕괴가 두렵다. "북한이 몇 년 안에 붕괴할텐데, 그러면 땅 찾는 부동산 소송부터 해서 얼마나 일이 많아지겠냐. 여러분에게는 블루오션이 기다리고 있으니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농담이라도 듣기 괴로운 말을 하는 교수님(국제법 아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변호사를 하겠다고 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년 전 일이니 이제 열린 자리에 써도 될 것 같은데, 2006년에 나는 모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하며 새터민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다. 차상위 계층 가정을 방문조사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상황인지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새터민 가정인줄 모르고 갔다가 실수를 저질러서 이후 몇 년 동안 반성하고 반성했으나 그 일은 아직 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생략하고, 어쨌든 그때 눈앞에 앉은 만삭의 아주머니가 "지가 두만강을 건널 적에......"라고 자연스럽게 말했을 때의 당혹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체험을 압도하는 타인의 경험이 어디 그것뿐이랴.

병원에서 항생제를 과다처방해줬으나 (약국에서 병원에 정말 이렇게 주냐고 확인전화를 했을 정도였다) 나 역시 당장 낫는 것이 급한 처지라 준 대로 먹었더니 이두의 염증은 한결 가라앉았다. 그런데 빨리 나아 보겠다고 따뜻한 물을 하도 많이 마셔서 배탈이 났다. 그래서 이 시각까지 못 자고 있다(지금 새벽 2:40). 베를린에 가고 싶다.

2010년 3월 9일 화요일

2010년 3월 8일 월요일

아침에 '아파서' 깼다. 너무 괴로워서 오전에 병원에 다녀왔다. 오후에 학교에 갔다. 6시간 연강인 날이었으나 결국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국제인권법 시간에 귀가했다. 어머니가 집에 와서 이런저런 먹거리를 만들어 주셔서 배불리 먹었다. 기운이 좀 났다.

2010년 3월 7일 일요일

2010년 3월 7일 일요일

큰일났다. 목이 팅팅 부어서 아프다. 생강차에 꿀을 넣어 마셨는데 별로 차도가 없다. 새벽에 조찬회의에 다녀온 남편은 해가 저물도록 잔다.

먹어야 기운이 날 것 같아 저녁에는 남편과 동네 삼겹살집에 다녀왔다. 그런데 목은 계속 아파서, 밤새 앓았다.

2010년 3월 6일 토요일

2010년 3월 6일 토요일

저녁에 동진님과 데이트를 하기로 했었는데, 동진님이 출근하고 시댁에 가서 계획이 틀어졌다. 심술이 났다.

미용실에 가야 한다는 아우님을 나의 넘치는 매력으로 유혹해서, 우리 집에서 교촌소이살살 치킨을 함께 먹었다. 아우님이 입장료로 맛있는 푸딩을 두 개 가져 왔다.

뒹굴뒹굴 하면서 후쿠오카 관광 책자를 보고 수다를 떨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을 맡은 아우님의 이야기 속 초등학생들은 요정처럼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고, 선생님의 모이를 기다리는 연약한 아기새 같다.

그런데 지금 아파트 놀이터에서 짐승 소리를 내고 있는 저 아이들은 그냥 시끄럽단 말이지.......

보고 싶던 아우님을 만나고, 밤에 아우님을 태우러 오신 아버지도 잠깐 뵈어서 좋았다. 야식으로는 시어머니표 해물채소 수프를 먹었다.

수강신청과 학사진로 계획때문에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끝에, 16학점을 신청했다. 금요일 1교시를 결국 넣었다. 공공거버넌스특성화에 대해서 궁시렁거리고 싶지만 관두련다.

2010년 3월 5일 금요일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오늘 센터에서는 '은혜 갚은 꿩' 읽기 수업을 했다. 내가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꿩을 잡아먹으려던 구렁이를 활로 쏘아 죽인다. 그날 밤, 헛간에서 잠자던 나그네에게 죽은 구렁이의 누이가 와서, 동트기 전에 빈 절에서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고 한다. 꿩이 머리로 큰 종을 세 번 들이받아 울린다. 구렁이는 약속대로 사라지고, 꿩은 머리가 깨져 죽는다.

 

오라버니를 잃은 구렁이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정직한 구렁이라서 복수를 하지 못했고, 나그네가 구해 준 꿩은 딱 한나절 더 살았을 뿐, 결국 죽었다. 나그네가 꿩과 구렁이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꿩 한 마리만 죽었을 텐데, 나그네가 선의로 개입한 바람에 결국 꿩도 죽고 오라버니 구렁이도 죽고 나그네의 여정은 지체되었다. 뭐 이래. -_- 누이 구렁이가 불쌍해서 마음이 아팠다.

 

학기 초라 새로 온 분들이 있어서 애국가를 배웠다. 알아 두어 나쁠 것 없기도 하고, 국적심사 때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가르친다. 읽기 수업에 하얼빈에서 온 J씨가 합류해서 학생이 늘었고, 다음 주부터 E씨와 한국어능력시험 3급 준비를 하기로 했다. 센터에 오는 분들 중에 서글프고 안타까운 사연 없는 사람이 없지만, 오늘부터 공부하면 안 되냐고 의욕을 보이는 E씨를 마주하며 순간 목이 메었다. 그렇지만 그와 나 모두를 위해, 유약한 감상에 침잠하기보다는 그에 발을 단단히 딛고 서서 눈앞의 삶을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침을 삼키고 "E씨 책으로 해요. 공부해 오세요. 열심히 해요." 하고 두주먹을 꽉 쥐어 들며 활짝 웃었다.

2010년 3월 4일 목요일

2010년 3월 4일 목요일

수강신청변경기간을 핑계로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표를 변경해 목요일을 빼 보려던 계획은 결국 실패했다. 결국 단지 잉여잉여하며 하루를 보냈다.

2010년 3월 3일 수요일

2010년 3월 3일 수요일 : 현민의 선고 공판

정치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동기 현민의 선고공판일이었다. 서부지방법원에서 오전 10시. 밤낮이 조금 바뀐 상태라 전날 새벽 4시 즈음에야 잠들어서 못 일어날까봐 걱정했는데, 날이 날이니만큼 긴장해서 잘 일어났다. 법원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니, 동기 신행과 도호, 이어서 후원회 일을 맡고 있는 후배들이 들어왔다. 좀 더 앉아서 기다리자 [전쟁 없는 세상]의 여옥 님, 다음주에 선고를 받는 다른 병역거부자 분 등이 오셨다. 현민은 기다리는 쪽이 초조해질 때 쯤 되어 나타났다. 현민의 어머니는 오시지 않았다.

공판장 앞에서 현민은 휴대폰을 넘기며 해지를 부탁하고, 속옷과 책 몇 권이 들었다는 종이가방을 들었다.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후배 중희가 지갑에 얼마 있는지 묻더니 혹시 모르니까, 하고 칠만원을 건넸다.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했다. 나는 남자 동기라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던 현민을 안고, 나도 모르게 등을 두드렸다.

법정에 들어갔다. 형사이다 보니 앞의 분들은 사기죄, 폭력죄.....병역법 위반으로 현민의 이름이 불렸고, 판사는 '주장하는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현행 헌법상 국방의 의무가 주장되는 양심의 자유에 우선하므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그런데 법정구속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바로 감옥에 갈 준비를 다 하고 있었는데, 신변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테니 오늘은 귀가해도 좋고 7일 후에 출두하란다. 우리는 우르르 들어갔다가 우르르 나와, 손을 벌벌 떨며 벤치에 주저앉은 현민을 둘러싸고 망연히 서 있었다.

현민은 아무 것도 먹을 생각이 없다며 일단 돌아가자고 했다. 법원 앞에 서서, 아침에 어머니가 갈비며 한라봉을 차려 준 이야기, 끝내지 못한 번역일정을 조정해 놓았는데 시간이 더 생겨서 감옥 간 척 잠수해 있어야겠다는 얘기, 감옥에 가져가려고 골라 놓은 책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교보문고까지 갔다가 막상 가고 보니 재판에 늦을 것 같아서 다시 돌아온 얘기를 조금 두서없이 늘어놓으며 추운데 세워 놓아서 미안하지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언제 또 있겠냐고 했다. 두 번 없길 진심으로 바랐다. 신념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은 한 번이면 족하다.

서부지법까지 온 김에 바로 옆 서부지검에 있는 CW양에게 잠시 들렀다. CW양은 법정구속이 안 되었다는 얘길 듣더니 판사가 예외적으로 무척 배려해 준 것이리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의 무게가 실감나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오랜만에 친정에 들르기로 했던 터라 집 근처 전철역에서 어머니와 만나 간단히 쇼핑을 했다. 딸에게 좋은 밥 챙겨주겠다고 분주히 만두를 빚던 어머니는, 현민의 이야기를 듣더니 거실 쇼파에 늘어져 있는 내 쪽을 보며 "어휴, 부모한테 어쩜 그런 불효를 하니. 하여튼 부모 마음보다 지들 신념이 중하다고......먹물이 너무들 들었어. 모르고 좀 편하게 살면 좋을텐데 알아서 그 고생을 하지."라며 한숨을 쉬셨다. 나는 어머니의 시선을 과장스레 외면하며 "그러게~말이에요~"하고 능청맞게 웃었다.

맛있는 만두국을 먹고 어머니와 수다를 잠시 떤 다음 동생의 침대에서 한숨 잤다. 생일 선물로 받은 가방에 생일 선물로 받은 옷, 모자, 내가 잠든 새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따뜻한 귀리빵 샌드위치를 두 개 받아 넣고 학교에 갔다.

집에 와서는 홍차를 우려 샌드위치를 먹었다. 두 개 다 먹었더니 무척 배가 불렀다. 나는 내 삶을 지배하는 포만감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누워서 배를 두드리며 남편의 귀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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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군이 평생 친구로 여기고 있는 도호에게 전화 이야기를 했다.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상담하고 싶었는데 도호가 지난 토요일에 사법시험 1차를 쳤던 터라, 직접 만날 수 있는 오늘까지 기다렸었다. 몹시 걱정하며 주말에 바로 KTX를 타고 내려가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공판장 앞에서 전화 연결이 된 B군은 멀쩡한 목소리로 나한테 전화한 적도 없다고 했단다. 내가 B군의 이야기를 하자마자, B군 일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도호가 바짝 긴장하며 휴대폰을 꺼내들어 무척 불안했었는데, 차라리 기억하지 못할 만큼 취했었다면 되려 (아주 조금이지만) 안심이다.

2010년 3월 2일 화요일

2010년 3월 2일 화요일

개강일이었다. 지도교수님의 수업시간에 지적을 받는 꿈을 꾸고 깼다. 실제로 오늘 첫 수업이 지도교수님 시간이다. ;

어슬렁어슬렁 학교에 갔다. 첫날인데도 수업을 제대로 했다. 수강편람 변경 때문에 꼬인 시간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한 상태라 걱정이다. 그러나 수업의 내용이나 교과과정과는 별개로 '공부하는 공간' 자체를 내가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은 새삼 느꼈다. 학교가 주는 긴장감은 역시 좋다.

2010년 3월 1일 월요일

2010년 3월 1일 월요일

흐리고 부슬비가 내렸다.

오전 내내 뒹굴뒹굴 하다가, 내일이 개강일인데 모처럼의 휴일을 이렇게 축 늘어져 보내면 후회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저녁에 동진님과 홍대 앞으로 놀러갔다. [행복카페 3번가] 제15권(완결)과 [파티] 4월호를 샀다. [판타스틱] 3월호가 나와 있어 들춰 보다가, 김상현 님의 인터뷰를 보고 한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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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문고 근처에 있는 일본라멘집에 가서 라멘을 먹었다. 원래 심스타파스에 갈 생각이었으나 따뜻한 국물이 어울리는 날씨다 싶어 무작정 들어가 보았는데, 무난하게 괜찮았다.



그리고 카카오봄에 갔으나 자리가 없어 바로 옆에 있는 가또 에 마미에 가서 초콜릿을 마셨다. 큰 탁자 앞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행복카페 3번가]는 무난하게 끝났고, 권교정의 신작 [셜록]이 실려 있어서 오랜만에 집어든 [파티]는 미묘한 느낌이었다. 어디서 본 듯한 학원물들이 많아서 그다지 볼거리가 없었다. 권교정의 신작은 기대되지만, 다른 연재작들과 대상 독자의 연령대가 좀 다른 것 같아서 걱정이다.

아홉 시쯤 귀가했다. 그새 다시 배가 고파져, 카카오봄에서 골라 온 '아프리카'와 다크 초콜릿 바크를 곁들여 홍차를 마셨다.

평화롭고 행복한 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