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28일 목요일

2005년 7월 28일 목요일

밤새 비가 많이 내렸다. 새벽 세 시 쯤이었던가, 빗물이 이불에 튀는 꿈을 꾸었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같은 큰 천둥이 쳐서 깜짝 놀랐다.

오전에는 H사에 잠깐 들러서 잔손 가는 일을 처리했다. 점심으로는 우동을 먹었다.

오후에는 홍대 앞에 있는 화실에서 첫 수업을 했다. 이번 주부터 일주일에 두 번, 화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간단한 일상/풍경 스케치가 목표로, 시험이 끝난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 시작했다. 일단 연필을 주 재료로 잡고 있고, 장기적으로는 색연필 등 쥐기 쉬운 도구로 색도 다루어 보고 싶다. 그림을 시작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이 어렵다. 어떤 글이든 조금씩, 꾸준히 쓰다 보면 글을 잘 쓰는 사람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펜을 편하게 드는 사람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가장 좋은 소재는 내가 직접 경험하는 일상일테니 습관화하기에는 일기만한 것이 없겠다 싶었다.

수 년 동안 일기를 꾸준히 쓰면서 다른 이점을 깨달았다 - 주위를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다. 대화를 할 때, 음악회에 가거나 영화를 관람할 때, 식사를 할 때, 그 순간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 기억하려고 애쓰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말의 경우) 건성으로 넘어가면 나중에 재생하기가 어렵다.

나는 방향감각이 엉망진창이고, 사람 얼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며, 집 베란다에 무슨 화분이 있는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이런 병통이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기는 하나, 나 같은 경우에는 그저 주위에 무심한 성격 탓이 아닐까 한다. 그림은 그래서 시작했다.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연주에서 '나는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내듯이,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된다면 -현실을 2차원적으로 해석해 내는 규칙을 이해한다면- 소재가 되는 것들(나를 포함한 이 세상 자체!) 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역시, 이왕이면 도구가 많이 필요한 유화나 세밀한 작업이 필요한 인물화보다는, 내가 직접, 언제 어디서나 보는 주위 풍경을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연필로 간단히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앞으로 계속해 나가기에도 좋겠지.

무슨 일이든 시작도 어렵지만 꾸준히 하기는 더 어렵고, 각오나 열정은 특히 희미해지기 쉬운 기억인고로, 시작한 날 써 둔다. 오늘은 스케치북을 사러 화방에 가서 신기한 미술 재료를 잔뜩 구경한 다음, 화실에서 예술혼을 불사르며 선긋기를 했다.

2005년 7월 27일 수요일

2005년 7월 27일 수요일











재종사촌 재준이와 아웃백스테이크 이대점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원래는 신촌점에서 보기로 했는데, 신촌 지리에 익숙치 않은 재준이가 이대점으로 가는 바람에 엇갈렸다. 요즈음 패밀리 레스토랑들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런치세트 메뉴 홍보에 열심인 듯. 딱 이 정도면 먹을 만 하다 싶다.

재준이가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 다시 만났다. 고등학생 때는 같은 일산에 살았고, 그 때문에 잠시 가르친 적도 있어 자주 보았는데, 내가 공부를 시작한 뒤에는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재준이가 신림동 바로 앞 기숙사에 살고 있는데도 거의 신경을 써 주지 못했다. 귀여운 동생이던 재준이는 그새 느낌 좋은 미남이 되어 있었다.까맣게 그을었다 싶더니, 지난 주에 친구들과 강원도 여행을 가서 20km도 넘게 걸었단다. 주 3회 팩차기(...)를 하는 등, 운동에 열심인 것 같아 보기 좋았다. 하지만 김X희 양이 듣는 수업에 세 번이나 청강을 가다니, 녀석, 공대생의 로망이 그런 거냐! (껄껄)

즐겁게 식사를 하고 나는 집으로 귀가, 재준이는 친구들과 놀러 갔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재미있겠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주 봤으면 좋겠다.

2005년 7월 27일 수요일 : 각자의 역할

벌써 이 주쯤 전 늦은 밤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별달리 할 일도 없으면서 그저 여기 저기 클릭해 보며 고시폐인에서 그냥폐인으로 업그레이드 중이었고, 종일 바빴던 어머니께서는 오른쪽 소파에 앉아 쉬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를 하고 나오시자, 어머니께서 한 마디 하셨다.

"요즈음은 아빠가 집안일을 제일 잘 도와주시는 것 같아."

오른쪽에서 무언의 압력 광선이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포즈를 취하며 외쳤다.

"하지만 저도 우리집에 사랑과 희망의 밝은 미소를 안겨주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요!"

솔직히, 말하고 3초간 후회했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어머니 옆에 앉으시며 놀리는 기색 하나 없이 태연히 말씀하셨다.

"그럼,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

"어, 저기요오. -_-;"

"왜 그러니, 밝은 웃음을 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데."

그러자 어머니마저,

"하긴, 그것도 참 중요하죠." 라고 수긍.

......이, 이래서야.......

2005년 7월 26일 화요일

2005년 7월 26일 화요일

일요일에는 너무 더워서 하루 종일 축 늘어져 있었다. 누워서 하루를 다 보낸 듯 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월요일에는 오전에 신림동에 있는 독서실에 갔다. 거의 2년동안 다녔던 곳이다. 하루 등록하러 왔다 하니, 총무님께서 웃으면서 그냥 들여보내 주셨다. 독서실에 앉아 원고를 읽고, 끼니 때면 고시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마치 시험 후 3주간이라는 긴 꿈에서 깨어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요일에는 광화문에서 전션과 함께 카페 이마의 아이스크림 와플을 먹었다. 전션은 이번에도 사무실에 발이 묶여 한 시간 넘게 늦었다. 이번에는 이리 될 줄 예상하고 미리 노트북까지 챙겨 나간 덕분에, 기다리는 사이에 꽤 집중해서 일할 수 있었다. 녹차 아이스크림과 초코 아이스크림을 얹은 와플을 냠냠 먹었다.(둘 다 상대가 카메라를 챙겼을 줄 알고 그냥 와서, 사진은 찍지 못했다.) 점심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때라, 좀 급하게 먹었더니 나중에는 속이 거북했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잡담을 한 다음, 콘센트를 찾아 맞은편 별다방으로 이동했다. 날씨가 매우 더웠다. 전션과는 저녁시간 좀 전에 헤어졌고, 귀가하기 전에 교보문고에 잠깐 들렀다.

2005년 7월 23일 토요일

2005년 7월 23일 토요일

지구정복비밀결사 상반기결산(설마) 모임. 이태원에 있는 인도음식점 타지마할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참석자는 상훈님, 에라오빠, 상현님, 상준님, 강명님, 파란날개님, 서늘님, 라슈펠님, 동진님, 나 이렇게 딱 열 명 이었다. 루크님께서는 이번에도 안 오셔서 팬으로서(...) 아쉬웠다. 동진님께서 참꼴님께서 발행하시는 '포토넷' 7월호를 가져와서 한 권씩 나누어 주셨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힘들었다. 겨우 전철역에서 타지마할까지 걸었을 뿐인데도 진이 다 빠진 느낌. 그래도 상훈님께서 꾸루미난♡을 미리 주문해 놓아 주신 덕분에 난이 비교적 빨리 나와서 기뻤다. 각종 커리, 마살라, 탄두리 치킨, 난, 밥 등을 잔뜩 먹었다. 언제나처럼 구도의 길을 가는데 큰 도움이 되는 재밌는 얘기를 많이 들었으나, 왜인지 몰라도 비위 상하는 화제가 자꾸 식탁에 올라 좀 당황스러웠다.

식후에는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근처의 스타벅스 이태원점으로 갔다. 집에서 쿠키를 가져갔는데, 다들 맛있게 드셔 주셔서 기뻤다. 비록 마지막 곰돌이 쿠키는 처참한 운명을 맞았으나......T_T

한국 SF계의 미래에 대한 냉철한 해석(같은 것은 없었지만), 스캔들의 진실, 빨대 터뜨리기 놀이 -이런 게 있을 줄이야!- 등 여기서도 흥미진진한 얘길 많이 들었다. 특히 서늘님의 인터뷰 1면 기사 제목 이야기에선 말 그대로 배꼽을 잡았다. 너무 웃으면 송구할 일인데,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킬킬 웃고 있다.

식후엔 다른 분들은 귀가 혹은 압구정으로 3차를 가시고, 상준님, 동진님, 강명님, 나는 신촌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신촌에 도착하고 보니 귀가하기엔 아쉽고 멀리 가기엔 애매한 시각이어서 망설이던 차에, 강명님께서 댁으로 청해 주셨다. 한밤중에 다른 사람 집에 불쑥 찾아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은 들었지만, 아쉽기도 했고 호기심이 동해 쫄래쫄래 쳐들어가고야 말았다.

강명님 댁에서는 들어가는 길에 사간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고, 권해주신 홍차와 맛있는 이슬차도 마셨다. 한국 SF계의 미래에 대해서도 조금 얘기했다(참말). 아직은 어려서일까, 실제로는 불편하고 성가시고, 때로는 꽤나 외로울 줄을 알면서도, '혼자 사는 집'을 보면 막연히 동경하게 된다.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강명님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온라인으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그저 그 사람의 글을 읽은 것 만으로도 이미 잘 아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이번이 그런 경우였달까나. 따뜻한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하는 재미가 하도 좋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평소보다 상당히 늦게 귀가했다. 더운 밤이라서인지 늦은 시각에도 여기 저기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2005년 7월 22일 금요일

2005년 7월 22일 금요일 :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제 24회 정기연주회

Program서곡 코리올란 c단조 Op/62 , 베토벤
Overture to "Coriolan" in c minor Op.62, L.V.Beethoven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 멘델스존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64, B.F.Mendelssohn
교향곡 제4번 Bb장조 Op.60, 베토벤
Symphony No.4 in Bb major Op.60 , L.V.Beethoven

지휘/정치용/ 바이올린/김상하

고클 편으로 초대권을 구해, 아우님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를 보았다.

너무 더웠다. 아해들도 아주 많았다. 아아, 그래,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시험이 끝난 후 지금까지 영화를 열한 편이나 본 터라, 이제는 영화 관람을 당분간 쉬고 - 은근히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더라. 오죽하면 시험 때문에 한 편밖에 보지 못했던 부뉴엘 회고전을 곧 다시 한다는데도 반갑기보다는, 나중에 했으면 싶었다. - 휴가 대신 시내에서 열리는 여름 연주회나 몇 군데 갈까 했는데. (대관령국제음악제 참석 계획은 성수기라서인지 숙소를 구하지 못해 결국 무산되었다.)

어린이 여러분들아, 박수 좀 아무 때나 치지 말란 말이다! 기침을 못 참겠으면 입을 가리는 센스라도 발휘하란 말이다! 학원 숙제 얘길 왜 여기서 하니? 다음 악장 시작하는 데 '어, 또 해?'라고 연주자들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하는 건 그냥 생각해도 예의가 아니잖아. T_T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는 자치구 차원의 유일한 오케스트라가 아닐까 싶은데, 미심쩍었던 첫인상에 비해 연주는 꽤 깔끔했다. 오히려 청중들이 엉망이어서 좀 미안했다. 특히 베토벤 4번의 경우, 2악장과 3악장 사이 같은 곳에서 박수를 치면 흐름이 완전히 끊어지는데.

어쨌든 비교적 가벼운 곡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라 참 편하게 들었다. 특히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본래 좋아하는데다, 아우님과 예전에 함께 들은 적도 있는 곡이다. 협연자의 연주는 무척 노련했으나,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악장에서 어수선하게 흐트러졌다. 베토벤 4번은 대단히 오랜만이었는데, 2악장과 3악장에서 깜빡 졸았다. (공연장에서 나올 때 아우님이 "언니가 조는 것 처음 봐서 놀랬어."라고 해서 민망했다.)

경쾌한 앵콜도 좋았다. 전석 초대로 정기연주회를 열고 있는데, 이 정도라면 유료 관객 제도 도입을 시도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저렴한 회비로 전 공연에 초대하는 연간 회원을 모집해 본다든지......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왔다.

2005년 7월 21일 목요일

2005년 7월 21일 목요일 : 플라네타 부르그 / 고요한 행성 / 도둑 맞은 폭탄


[화요일/ 수요일 즈음에 기념으로 뱃지 세트를 샀다.]

플라네타 부르그 Planeta Burg
감독 : 파벨 클루샨체프 (Pavel KLUSHANTSEV), Soviet Union, 1962, 74min

금성을 지구의 '쌍둥이 행성'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 아마 1960년대인가보다. '플라네타 부르그'와 고요한 행성 두 편 다 금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플라네타 부르그'에 나오는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들과 로봇이 방문(내지는 불시착) 하는 공룡과 익룡과 기분나쁘게 생긴 파충류와 뱀과 식충식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 꿈틀거리는 생명체들과 묘령의 여인(?)이 산다. 당시에 금성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틀린 부분이야 그렇다 쳐도, 우주복 헬멧을 뒤집어 쓴 채로 해변가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장면이나 헬멧 뚜껑을 열고 약을 먹으면서 산소통의 산소가 떨어져 간다고 걱정하는 장면은 그저 성의 부족으로 보였다.

중반 까지는 그럭저럭 이야기를 따라갔으나, 뒤로 갈수록 전개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고, 그 중심에 편협하게 그려진 [구색맞추기] 여자 인물이 있어서 좀 짜증스러웠다.

고요한 행성 First Spaceship on Venus
감독: 쿠르트 매치히 (Kurt MAETZIG), East Germany/Poland, 1959, 80min

과학자들이 고비 산맥에서 외계 우주선에 담겨 온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 장치를 발견하여 그 내용이 지구의 원소 정보를 담고 있음을 밝혀내자, 세계 인류(!)는 생명체를 찾아 금성으로 향하기로 결정한다. 소련 비행사를 대장으로 해서, 중국, 일본, 미국, 아프리카 등의 대표격인 비행사들이 모여 '코스모크라토'(cosmo + kratos라니!)를 타고 금성으로 출발한다.

영화를 볼 때는 '플라네타 부르그'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이리라 생각했으나 나와서 확인하니 59년 작이라 놀랐다. 외계인의 메세지에 E=MC² 같은 말이 등장했을 때 웃었는데, 59년이라면 나름대로 최신 연구 결과의 반영 아닌가. :)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얘기가 꽤 많이 나오고, 결론(?)도 금성인들이 핵폭탄으로 멸망했다는 것이다. 59년이면 원폭 투하 후 이십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라, 묘한 기분이었다.

음침한 금성 묘사는 '플라네타 부르그'보다 설득력 있었지만, 주인공들이 연설을 너무 많이 해서 선전 영화 같았다. 스타트렉 에피소드 같다는 느낌도 들었따.

특히 초기에 만들어진 동구권 SF영화들에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뢰, '발전 단계'의 최고봉에 선 문명인이라는 자신감, 지나치게 순진한 이상주의로 보이는 '세계 국가'와 '연합의 가능성' 에 대한 희망이 뚜렷이 나타난다. ('고요한 행성'은 심지어, 세계인민들이 손에 손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으로 넘어갈수록 꿈이 있던 자리를 상상했던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에 대한 희화화, 외면, 저항, 반성이 차지하는 것 같다. 동구권 SF를 지금까지 겨우 십여 편 본 사람으로서 성급한 결론일지 모르지만......손을 내밀면 꿈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묻어나는 대사를 듣고 있자면, 간지러우면서도 아련히 안타깝다.


도둑 맞은 폭탄 A Bomb was Stolen
감독: 이온 포페스쿠-고포 (Ion POPESCU-GOPO), Romania, 1961, 65min

반핵(反核) 메세지가 분명한 무성영화. 목요일에 본 세 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특히 엔딩이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2005년 7월 20일 수요일

2005년 7월 20일 수요일 : 성운 속에서

감독: 고트프리트 콜디츠(Gottfried KOLDITZ) , East Germany, 1976, 102min

재미있게 봤다는 사람들이 있기에 기대했는데, 새드엔딩이었다. 작자는 대단히 진지하게 만든 영화가 그저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우스꽝스러워진 모양은 웃기기보단 씁쓸하다.

영화를 본 후에는 종각역 반디앤루니스에 책 구경을 갔다. 딱히 살 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 그냥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며 다니던 중, a님의 데이트 현장을 목격했다! 슬금슬금 접근해서 깜짝 놀라게 해 드린(...) 다음, 매장에서 나가는 길에 잡지매대 코너 구석에 놓인 'New Scientist'를 샀다. 정기구독을 하면 권당 4000원 정도밖에 안 하는 책을 만 원이나 주고 사려니 속이 쓰렸지만, 표지에 구미가 동해 어쩔 수 없었다.

빅뱅 이론에 대한 반론이 힘을 얻고 있다는 소문은 몇 년 전부터 들었으나 그 내용을 정리한 글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나처럼 과학계와 무관한 사람의 귀에까지 소식이 들리는 것을 보면, 정말 패러다임의 이동(Paradigm Shift)이 눈 앞에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빅뱅 이론처럼 확고해 보이던 것이 흔들리다니, 우주론의 '변혁의 순간'에 살고 있다는 실감에 짜릿하다. 벌써부터 "이 할머니가 어렸을 적엔, 우주가 아주 작은 점에서부터 팽창했다고 생각했단다." / "에에, 거짓말!" 같은 망상 진행중.;

쓰는 김에 간단히 정리해 두자면-

Eric Lerner는 '이것[빅뱅]은 과학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빅뱅 이론의 예측은 계속해서 틀렸으며 사후적으로 수정되었을 뿐'으로, 오늘날 우주론의 정상 이론은 '기본적인 빅뱅 이론에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내키는 대로 갖다붙인 잡동사니'란다.

그는 Spitzer 우주망원경의 관측 결과를 근거로 든다. 빅뱅이론에 따르면, 아주 멀리 있는 천체의 경우 그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데 걸리는 긴 시간 때문에 우리 눈에는 그 천체의 '과거'모습이 보이게 된다. 그런데 Spitzer 망원경이 발견한 600만년에서 1억년 정도 나이의 적색편이를 나타내는 젊은 은하들은 적색거성이 포함된 양 붉은 빛을 내고 있다! 우리가 '과거의 젊은 은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냥 우리 근처에 있는 은하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다양한 나이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Lerner는 적색편이 현상 자체가 우주 팽창과 무관한 매커니즘으로 발생한다는 극단적인 입장이다. (적색편이의 아리송함은 창조론자들이 즐겨 드는 논거이기도 하다. -_-)

러너는 또한 우주배경복사가 빅뱅의 흔적이 아니라 별빛이 플라즈마로 흡수되었다가 재방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건 진짜 그럴듯한데? 우주의 99%가 플라즈마라며?

Scarpa의 경우, 빅뱅이론에 따르면 암흑물질이 검출될 수 없는 구상성단 내 wayward star들에서도 암흑물질이 나타났다는 관측 결과를 반례로 든다. 소위 암흑물질이 너무 많이, 너무 아무데서나 나온다는 것이다. Scarpa는 MOdified Newtonian Dynamics(MOND)를 지지하며, 암흑물질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빅뱅이론에 따르면 팽창하는 우주는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다. 그런데 Magueijo와 Land는 우주배경복사를 분석한 결과, 고온과 저온 spot이 랜덤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패턴을 갖고 특정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는 연구 내용을 발표했다. Magueijo는 이 방향을 '악의 축'이라고 이름붙였단다. -_-; 어쨌든 이것은 대폭발을 거친 우주가 전방향으로 팽창한다는 현 이론과 맞지 않는다. 방향성이 있는 모델로 이 연구자들은 1)특정 축을 갖고 회전하는 우주 2) 베이글처럼 생긴 우주 3) 2차원적으로 무한히 팽창하면서 3차원계에서는 20억 광년 정도만 팽창하는 우주를 제시한다. 3번 우주가 사실이라면 참 재미있겠다.

각 이론에 대한 반박도 만만찮지만 그야 지금까지 자주 들어온 이야기므로 생략. 빅뱅이론에 대한 반론이 설득력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논거가 관측 기술의 발달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핏쪄 우주망원경은 지금까지 나온 망원경 중 적광에 가장 민감한 덕분에 멀리 있는 은하들의 붉은 빛을 잡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스칼파와 마게이쥬의 분석도 2001년에 설치된 WAMP(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의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다음 정상 이론이 나오려면 지금의 빅뱅이론이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만큼 당장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나긴 어렵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상상도 못 한' 신이론이 등장할 날이 다가온 것 같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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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도중 문래역에서 마을버스를 잘못 타서 동네를 삼십 분쯤 헤맸다. 우리 아파트가 있는 방향을 제대로 짐작하지 못해 아파트 촌 사이를 걷고 걷다가 간신히 당산역을 찾아냈다. 어떻게 낯선 동네도 아니고, 자기 사는 곳에서 이렇게 헤맬 수가 있는지......orz

2005년 7월 20일 수요일 : 폐인의 외침

이른 시간에도 싸이월드를 사용해주시는 회원님 감사합니다.
정기점검으로 서비스가 일시 중지된 상태입니다.
서비스 이용에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점검부분: 싸이월드 서비스 전체 서비스
점검시간: 2005년 7월20일 (수) 새벽 2:00 ~7:00 (5시간)

'이른 시간'이라니, 지금은 '늦은 시간'이란 말이다! 난 자려면 아직 멀었다고! orz

2005년 7월 19일 화요일

2005년 7월 19일 화요일 : 시험 비행사 퍼크스 / 은하에서 온 방문자들

오전 열한 시에는 G사에 가서 계약서를 쓰고 중식집에서 점심으로 볶음밥과 탕수육을 먹고, 그 길로 서울아트시네마에 가서 '리얼 판타스틱 영화제' 중 두 편을 더 보았다.

시험 비행사 퍼크스 Test Pilot Pirx
감독: 마렉 피에스트락 (Marek PIESTRAK), Poland/Soviet Union, 1979, 104min
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영화. 인간보다 효율적인 비행 전문가 로봇이 만들어지자, UN 산하 유네스코에서는 외견상 인간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이 로봇을 대량 생산해도 문제가 없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 비행을 하기로 한다. 인간인 퍼크스 사령관은 이 시험 비행의 기장 자리를 제안받고 처음에는 거절하나,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로 죽을 위기를 넘기고 나자 '내가 시험비행을 맡지 않길 원하는 사람들의 뜻에 따를 수 없다'며 우주선을 탄다.

여자는 비서밖에 나오지 않는 영화로, 남자들만 계속 나오는데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 점은 이번에 본 다른 동구권 SF영화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보는 '외국인'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애당초 익숙하지 않으니까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무엇인가f'라는 심각한 질문을 제대로 던지지 못해 지루해진 영화였다. 긴장감은 그런대로 유지되었으나,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지 않게 만드는 안이한 구석이 있었다. 이데올로기적 배경에서 비롯된 헐렁한 이상주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설핏 들었다. 특히 마지막 국제연합 사법재판 장면은 상당히 지루했는데, 사법부의 정의/권위가 그렇게 폼 잡고 십여 분동안 보여줄 만큼 대단하지 않고, 대단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낀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등산 장면은 없어도 좋았겠다. 나라면 의사와 악수하는 장면에서 영화를 끝냈으리라.


은하에서 온 방문자들 Visitors from the Galaxy
감독: 듀상 뷰코틱 (Dusan VUKOTIC), Yugoslavia/Czechoslovakia, 1981, 82min
굉장히 신나는 B급 특촬물이었다! 주인공은 책상 앞에 앉아 우주비행사 머리뚜껑(!)을 뒤집어 쓰고 녹음기에 아이디어를 기록하는 과학소설 작가 지망생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녹록치 않아서, 주인공은 뭘 녹음하려 할 때 마다 애인이 망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여자친구나 개를 키우냐 마냐로 옥신각신하는 이웃집 모자(母子)의 방해를 받는다.

그런데 이 주인공에게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간절히 원하는 것을 현실로 이루는 능력'이었다. 그 때문인지, 주인공이 쓰기 시작한 소설에 나오는 아카나 은하계 출신 외계인 세 명이 정말로 주인공네 집 근처 섬에 나타나고, 주인공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상황에 휘말린다.

가벼운 코메디로 시작해서 특촬물->로맨스->엽기 호러로 발전(?)하는 전개가 군더더기 없이 경쾌하고 즐겁다. 호러 단계에선 당황해서 손가락 사이로 보았지만. 하하. 조그만 정육면체로 변신한 여자친구 비바, 사진작가 지망생 이웃,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몬스터, 발가벗고 외계인들을 다정하게 맞이하는 휴양객들, '외계인의 손가락'.......이번 리얼판타에서 본 영화 중 두 번째로 재미있었다. (첫 번째는 물론 섹스미션.)

저녁에는 미엽이네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미엽이가 각종 해산물을 넣은 개운한 국수와 각종 야채를 채썰어 만든 김쌈을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후식으로는 토마토, 복숭아, 빵, 얼린 바나나와 우유를 섞어 간 시원한 음료까지! 미엽이의 요리 / 살림솜씨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맛있게 먹고, 신나게 수다도 떨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늦은 시각이라 미엽이의 피아노 연주는 듣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음엔 낮에 놀러 가야지. ♡

2005년 7월 18일 월요일

2005년 7월 18일 월요일

'팔 개월마다 한 번씩 만나는' 궁님과 만나 역삼역 스타타워의 쌀국수집 Pho75에서 점심으로 75번 국수와 스프링롤을 먹었다. 궁님의 새 차 - BMW!- 를 타고 동네(?)를 엉금엉금 한 바퀴 돌았다. 여전히 운전면허를 딸 생각은 없지만, 단정한 차를 보니 나도 내 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뵌 궁님과는 룰루랄라 즐겁게 논 후 학교에 가서 복학신청을 했다. 복학신청 기간이 금요일까지인 줄 알고 서둘러 갔는데, 월요일 마감이었다. 도서 대출은 복학 신청이 전산 처리되는 8월 말에나 가능할 듯 하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서관 이용이 가능해지는대로 연락 달라고 부탁드렸다.

날도 덥고 하니 시원한 학교에서 빈둥거리기로 결정, 사회대 전산실에서 놀았다. 그런데 한 시간쯤 놀다 보니 갑자기 형광등이 모두 꺼지는 것이 아닌가!(컴퓨터는 그대로 작동) 불은 곧 들어왔으나......그 때부턴 냉방이 안 되었다. 잠시 더 버티다 더위에 항복하고 귀가. 돌아오는 길에 한양문고에 들러 따끈따끈한 노다메 12권을 샀다.

2005년 7월 16일 토요일

2005년 7월 16일 토요일

























승민오빠와 몇 달 만에 만나, 이대 근처의 회전초밥집 '이코노스시'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원래는 선릉 근처에 있다는 승민오빠가 추천하는 초밥집에 가기로 했으나, 오빠에게 다른 일정이 있기도 하고, 나도 이대 쪽이 집에서 훨씬 가까워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약속 장소를 옮겼다.

'이코노스시'는 상호 그대로, 저렴하고 갈 만한 음식점이었다. 탁월하단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맛이 기본선에 충실하고 가격이 낮은 편이라 부담 없이 갈 만 했다. 게다가 집에서 가깝기도 하여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과일까지 배불리 먹은 후 찻집 티앙팡에 가서 차를 마셨다. 나는 트와이닝 얼그레이, 오빠는 드래곤 어쩌고 하는 프루트 인퓨전과 우유 푸딩. 티앙팡 점장님(?)은 차를 참 능숙하고 예쁘게 타셔서,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마주보고 앉아서 꾸벅 꾸벅 졸다가, 아홉 시쯤 헤어졌다. 진오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왔기에 전철역에서 되걸어 봤는데, 마침 홍대 근처에서 늦은 저녁을 드는 중이란다. 동생까지 함께 있다니 웬일인가 싶어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만나러 갔다. 중학생 내지 고등학생 즈음에 마지막으로 만난 후 처음으로 다시 본 진오 동생은, 그새 보조개가 귀엽게 쏙 들어가는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진오가 제대 후 복학하여 살 집을 알아보러 함께 올라왔단다.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진오를 괴롭힌 후(뻥) 하겐다즈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진오가 복학한다니 기쁘다. 버스로 겨우 십오 분 남짓한 거리에 살면서도 1) 내가 고시생이었고 2) 진오가 마산에서 군(?)생활을 하는 바람에 거의 만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는데, 이번 학기에는 자주 만날 수 있음 좋겠다.


녹차 아이스크림과 라스베리 소르베(둘 다 무척 좋아한다.)

이렁저렁 얘기하다 보니 열시 오십 분 쯤에 집에 들어갔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신이 나서 걷고 있는데, 아파트 단지 초입에서 주차된 승용차 뒷좌석에 탄 이상한 아저씨가 손을 쑥 내밀더니 치마 위로 담뱃불을 탁 턴다. 당황해서 쳐다보니 시비가 걸고 싶어 근질근질한 얼굴로 빤히 마주보며 피식 웃더라. 기겁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집까지(래봐야 겨우 일이 분 거리였는데!) 정신없이 걸어왔다. 평소에는 주차된 차에서 한두 걸음 사이를 두고 걷는 편인데, 좁은 길인데다 어둡지도 않은 집 근처라고 방심하다가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너무 무서웠다. 밤엔 길도 걷지 말란 말이냐! 대체 안심하고 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진정하고 나니 화가 나기보단 슬프고, 좀 비참했다.

2005년 7월 15일 금요일

2005년 7월 15일 금요일 : 섹스미션 / 우주에서의 조우

리얼판타스틱 영화제 中 '마르크스 침공! 동구권 SF 영화 특별전' 상영작.

섹스미션 Sexmission
감독 : 율리우즈 마슐스키 (Juliusz MACHULSKI) , Poland, 1983

대단히 유쾌한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이런 B급 감성이 살아있는 괴작을 건지(?)다니 얼쑤 좋구나. SF컨벤션이나 상영회를 한다면 우리도 꼭 틀어야 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초초초초강력 추천.


우주에서의 조우 Encounter in Space
감독 : 미카일 카르추코프 (Mikhail KARZHUKOV) , 오타르 코베리제 (Otar KOBERIDZE), Soviet Union, 1963

러닝 타임이 겨우 한 시간 정도인데도 졸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군가 내지 운동가 티가 풀풀 나는 노래, 뭔가 어설픈 연설 등 60년대 냉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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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신림동에서 학번모임을 했다. 군에 갔던 동기들이 휴가를 얻거나 제대해서 많이 왔다. 늦게 도착해, 미진이, 경아와 우리은행 앞에서 만나 호프집으로 갔다. 보미, (연애를 시작했다는!) 경훈이, 제대를 앞둔 신행이와 찬수, 올해 제대한 해병님(-_-) 도호가 먼저 와 있었다. 함께 '동학'이라는 곳으로 옮겨가 2차. 저녁식사를 하지 못한터라 찌개를 시켰는데, 찌개만 있고 밥은 없댄다.; 그래서 전도 주문, 나 혼자 1/3 이상을 먹었다. 곧 카투사 지홍이와 윤진이, 진우오빠도 왔다. 오랜만에 동기들을 많이 만나서 굉장히 반갑고 기뻤다. 지홍이와 도호는 거의 2년 만에 다시 봤고, 다른 동기들과도 이렇게 느긋하게 함께 웃어본 게 꽤 오랜만이다. 동기들을 만날 때마다 인연에 감사하게 된다.

2005년 7월 14일 목요일

2005년 7월 14일 목요일 : 예술의 전당 11시 콘서트 / 앙리 까르띠에-브레송 展

11시 콘서트 프로그램

로시니 '윌리엄 텔' 서곡
베토벤 교향곡 제 6번 (전원) 3, 4, 5악장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2, 3악장
비발디 '사계' 중 '여름'
그뢰페 '그랜드캐년' 모음곡 5번

지휘 : 서현석
협연 : Vn. 안동호, Pf. 유소영
연주 :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해설 : 김용배

'삼성 로즈 플래티늄과 함께하는 예술의 전당 11시 콘서트'였다. 이런 후원사가 붙은 공연은 대개 초대권으로 좋은 자리를 채우고, 그 때문인지 몰라도 청중 매너가 나쁜 경우가 많아서 - 달리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경험칙이다 - 꺼리는 편인데, 이번에는 어차피 까르띠에-브레송 전을 관람할 계획이었는데다 평소와 다른 오전 시각에 부담없이 음악을 들어 보고 싶기도 해서 호기심에 한 번 가 보았다.

로비에선 아침식사와 공연 세트 티켓을 산 청중들에게 빵과 커피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따뜻한 빵 냄새는 좋았지만, 수백 명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일행을 찾다 보니 너무나 시끄러웠다! 700석 이상인 공연이 거의 매진이었으니.

나는 곡 전체를 이어 듣는 편으로, 몇 악장만 떼어 연주하는 것은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들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갔으나, 뜻밖에 공연은 예상보다 훨씬 즐거웠다. '폭풍우'라는 테마를 두고 비발디(고전)부터 그뢰페(현대)까지 폭풍우를 묘사한 부분을 골라 연주하는 공연이었다. 각 곡 연주 전에 해설이 붙었고, 악장이 바뀌거나 표제가 전환될 때 마다 프로젝트로 표시해 주었다. 쇼스타코비치의 피협은 표제음악 사이의 숨고르기 삼아 넣었다 한다. 사계 연주 전에는 바네사 메이의 뮤직비디오(?)를 잠시 틀어 주었는데, 같은 부분을 곧장 비교해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해설이 유익하면서도 재미있어 해설자가 누구인지 찾아봤더니 예당 사장이자 피아니스트인 김용배 씨였다. '사장님'이 직접 나와서 이런 일도 하는구나, 하고 좀 놀랐다.

학생들이 몇 보였지만, 아직 본격적인 방학 시즌이 아니라서인지 어른 관객이 대부분이었다. 흥미롭게 진행되고 각 연주가 짧아,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숙제도 할 겸 해서 찾는다면 재미있게 듣고 배울 수 있겠다. 내가 학생 때 이런 공연을 좀 더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청중이 하도 많아 맹렬하게 기침하는 사람, 휴대폰을 벨소리로 해 놓은 사람, 합창석에 앉아 좀 큰 소리로 잡담하는 사람 등이 계속 있었던 점이 아쉽다. 어쩔 수 없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취소표를 기다렸다가 공연 전날 예매한 덕분에 두 번째 줄, 해설자 바로 앞 자리에 앉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공연을 본 뒤에는 '찰나의 거장 - 앙리 까르띠에-브레송 전'을 보았다. 일기를 미뤘다 쓰려니 그새 기억이 무디어져 감상 쓰기가 어렵다. 간단히 줄이자면 : 풍경 사진은 좀 어려웠고, 인물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매우 인상깊어 몇 번이나 다시 돌아 보았다. 까르띠에-브레송의 작품인 줄 몰랐던 사진도 많이 있더라.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동진님께서 초대권을 주신 덕분에 (고맙습니다) 전시 마지막 주에야 갔는데, 아아, 오길 잘 했어, 싶었다. 도록은 샀고, 포스터는 사고 싶었으나 마땅히 보관해 둘 곳이 없어 단념했다.

까르띠에-브레송 전을 보던 중에 재영이와 연락이 닿아 신촌에서 접선하기로 했다. 꾸벅 꾸벅 졸며 신촌에 가서 재영이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며칠 전에 QNA에 올라온 질문이 머리에 남은 때문인지 갑자기 크리스피 크림 도넛이 무척 먹고 싶어졌다. 재영이도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할 터라, 한 상자를 사서 나 한 개, 재영이 두 개 먹고 나머지는 재영이가 동아리에 가져 가면 되겠다 싶어 12개 들이 박스를 사서 스타벅스에 들고 갔다.

조희룡 산문집을 읽으며 도너츠를 먹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나. -_-

게다가 재영이와 얘기 나누면서 두 개를 더 먹고 말았다. 총 여섯 개를 먹고 나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재영이도 세 개 먹고 나니 처음 계산과 달리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 "이거라도 가지고 가서 나눠 먹어." "그런데 이만한 상자에 열어보니 세 개라니 좀 그렇다, 그치?" "응, 열어보면 무지 황당하겠다." 결국 재영이는 다른 빵을 담아왔던 작은 봉지에 도너츠 세 개를 담아 갔다.

재영이는 8월 초에 출국한단다. 휴학하면 마산에 있을 예정이라니 다음 학기에는 얼굴 보기 어렵겠구나. 애써 준비해서 가는 만큼 많이 배우고 건강하게 돌아왔으면 좋겠다.

2005년 7월 13일 수요일

2005년 7월 13일 수요일




쉬크케밥

치즈와 야채가 들어간 커리

동진님과 DAL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양고기 케밥과 야채 커리를 먹었다. 난이 아니라 밥을 주문했는데, 나온 커리를 보니 난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둘 다 매웠지만 호호 불어가며 깨끗하게 비웠다.


칡꽃차

이디오피아

초코케익

광화문에 있는 참꼴님네 회사에 놀러갈까 하고 전화를 몇 번 드렸는데, 안 받으셔서 둘이서만 광화문 '나무사이로'에 갔다. (신림동 '나무사이로'는 문을 닫았다.) 세종문화회관 뒷편에 오피스텔 대단지가 생겼고 초원죽집은 간판을 새로 달았다. 진한 초코 케익을 곁들여 차를 마셨다. 광화문 나무사이로는 조명이 밝은 점이 좋았고, 흡/금연 구분이 없는 점이 아쉬운 곳이었다.

막 일어서는 차에 참꼴님이 전화를 주셔서, 셋이 함께 동진님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사진잡지를 만드시는 참꼴님은 '사람들이 소주는 몇 병씩도 사 마시면서 만 원짜리 책 한 권을 안 산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요새 출판 시장이 참 많이 어렵긴 한가 보다. 어제 K사 사장님도 '[어떻게 된 셈인지] 작년보다 출판 경기가 더 어려워요.'라고 하셨고......일단 판매고 자체가 턱없이 낮아지고 있으니. 졸문을 파는 사람이기 이전에 열렬한 독자로서, 좋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는 지금 상황이 안타깝고 슬프다.

식사는 대단히 즐거웠고, 못 뵐 줄 알았던 참꼴님과 인사나마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2005년 7월 12일 화요일

2005년 7월 12일 화요일 : 아일랜드

바쁜 하루였다. c님과 점심으로 양 많은 돈까스를 먹고, c님의 사무실에 구경을 갔다. 책 냄새가 물씬 나는 멋진 사무실이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오래 된 잡지를 구경한 다음 함께 K사에 갔다. K사 사무실도 풀과 돌이 많고 햇살이 많이 드는 느낌 좋은 일터였다. 어디서나 마음 먹으면 일 하기가 어렵겠냐마는, '좋은 공간'이 주는 안정감 역시 가볍게 여길 바가 아니다. 수많은 프리랜서들이 멀쩡한 집을 두고 굳이 노트북을 짊어지고 카페에 나가는 것도 '일'을 위한 공간이 필요해서가 아닌가.

K사에서 나와서는 서울극장서 아일랜드를 보았다. c님 덕분에 처음으로 '언론 시사회'에 가 보았다. 가방도 뒤지고 금속탐지기도 통과했다. 오호라, 신기해라.

마이클 배이의 영화는 딱 예고편에서 기대할 만한 내용이었다. 즉, 자의식을 갖게 된 복제인간이 감옥을 탈출해 악당을 무찌르고 미인을 쟁취한다. 별 생각 없이 보기에는 괜찮은 여름 블록버스터이지만, 소재를 다루는 방식 - 어설프게 뒤집어쓴 윤리적 고민의 껍질이랄까나 - 은 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 시작 전에는 팀 버튼의 'Corpse Bride'의 트레일러가 나왔다. 어서 개봉했으면 좋겠다.



관람 후엔 선릉역 자바시티커피에서 열리는 책모임에 갔다. 참석자는 정훈님, 뎡만님, 뎡만님의 [동안이신] 아우님, 홍댕님, 야니님, 나. 구워 간 쿠키를 다들 맛있게 드셔 주셔서 기뻤다. 이런 저런 책 구경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잔뜩 들었다. 너무 웃어서 나중에는 눈물이 다 났다. 게다가 조프님께서 정훈님 편으로 맛있는 초콜릿을 보내 주셨다! 와아, 고맙습니다. (꾸벅)

귀가길 지하철이 어찌나 붐비는지 몸 둘 곳이 없어, 사당역 근처까지 40도쯤 기울어진 자세로 왔다.

2005년 7월 11일 월요일

2005년 7월 11일 월요일 : 당신의 전생은...

나의 결과-_-


여기에서 해 볼 수 있답니다.

2005년 7월 10일 일요일

2005년 7월 10일 일요일 : 우주전쟁

휴가 나온 인수오빠와 신촌 아트레온에서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우주전쟁을 보았다.

'이게 뭐니, 이게.' 란 말이 절로 나왔다. 중간중간 감탄할 만한 장면도 없지 않았으나, 트라이포드의 디자인이 참고 봐 주기 힘들 만큼 부실해서 보기 괴로웠다. 어차피 21세기로 배경을 옮겼으니, 메카닉을 조금 더 창의적인 형태로 디자인했어도 좋았을 텐데. 너무 비효율적으로 생겨서 침공을 하든 살인을 하든 설득력이 없었다. 자국을 the world's greatest power라고 망설임 없이 칭하는 센스(?), 어설프게 끼워 넣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별 장면, 영화 말미에 뜬금없이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자 우리 이제 감동해 보아요' 음악......아아, 음악이 정말 웃겼다. 끔찍한 장면에 몸서리치다가도 '오버'하는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그만 김이 새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엔딩은 [말이 많던데] 내가 보기에는 별 무리 없었다.

참, 그리고 '아버지'의 부주의함이 짜증스러웠다. 특히 초반부에서,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열 살 짜리 겁먹은 딸을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부실한 집에 내버려 둔 채 위험한 곳으로 구경을 가다니! 굳이 직접 상황을 판단해야겠으면 살짝 보고 이상하다 싶은 순간에 집으로 와서 애들부터 챙겨야 하는 것 아냐?

장점이 없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 별 줄거리가 없는데도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연출이나 구성의 힘은 상당했고, 속도의 고저 조절도 좋았다 - 단점이 과하게 크다. 저렇게 잘 찍으면서 어떻게 저 정도 결과물밖에 못 만들까, 싶어 좀 안타까웠다.

극장에서 나오며 백 년 전에는 무척 흔하고 당연했을 '기계'에 대한 환상을 새삼스레 생각해 보았다. 요즈음 상식으로 보면 쓸데없이 거대한 쇳덩이를 낭비하는 것 보다는 유기체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무지막지하게 자라서 지구를 덮어버리는 거대한 외계식물 얘기는 Disch의 70년대 소설에 이미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어차피 이런 느낌을 만들고 싶었다면 War of the Worlds 보다는 디쉬의 The Genocide를 활용하는 편이 나았을 걸 싶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전개가 가능했을 텐데. 어차피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딸을 안고 남의 지하실에서 찾아 낸 도끼로 지구를 덮은 거대 식물의 뿌리를 파헤치며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아버지' 식으로 아무 데나 복사해 붙여도 무리없이 쓸 수 있으니 말이다.

요즈음은 거대 유기체 유행도 한 물 가서, 유비쿼터스 나노봇 같은 쪽이 더 설득력 있게 쓰이는 모양이지만.


시금치수프

샌드위치

점심은 홍대 앞 제니스 카페테리아에서 먹었다. 오빠에게서 'The Perfect Circle'을 빌리고, 마이클 스완윅의 책을 몇 권 빌려 드렸다. 스타트렉 만화를 가져가기로 해 놓고 깜박 잊었다. 갖고 싶던 켈X그 콘XXXX 의 광선검 스푼을 선물로 받았다! 파란색이다. 이히히.


카푸치노

식후에는 카페 비하인드에 가서 차를 마시며 수다. 홍대 한양문고에 들렀다가 귀가했다. 오빠는 대전 집으로 내려갔는데, 호우주의보 발령으로 집에서 발이 묶였단다. 휴가를 많이 기다렸을 텐데, 안타깝다.

2005년 7월 9일 토요일

2005년 7월 9일 토요일 : 비엔나의 두 거장 - 위대한 모차르트와 말러


토마토 바질 샐러드

브로콜리 크림 스파게티

아우님과 라리에또 압구정점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새 새로운 가게나 건물이 많이 생기고 없어졌다. 크리스피 도넛 압구정점이 구 올리브 자리에 개점을 준비중이다.

전채로 토마토 바질 샐러드, 식사로는 나는 치킨 페투치니, 아우님은 크림 스파게티. 둘 다 아침식사를 않고 나온 터라 샐러드가 나오자마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먹어치웠다. 배고픈 김에 평소에는 손대지 않는 마늘빵까지 깨끗이 비웠다. 덕분에 식사가 끝날 즈음엔 배가 불러 헉헉.

식후에는 압구정 커피집에 갔다. 아아, 얼마만이람, 이 고소한 커피향! 오랜만에 갔는데 마침 선생님과 실장님 두 분 다 계셔서 기쁘고 반가웠다. 게다가 백만년만에 '진짜로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아우님과 한담하던 중에, 동진님+Philia75님과도 우연히 마주쳤다. '우주전쟁'을 보고 오셨단다. Philia75님께서 드립하시는 모습을 구경(?)하고 넷이 같이 앉아 이야기도 나누었다. 두 분은 이 달 말에 모처로 밀월여행을 떠나신다. (미묘하게 왜곡된 정보임.)


에스프레소 도피오

두 분이 먼저 가시고, 아우님과 나는 이디오피아를 조금 마신 후, 커피 두 봉을 사 들고(블렌드와 콜롬비아) 십오 분쯤 뒤에 일어났다.


커피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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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제 2번 라장조 작품 136
말러 교향곡 제 3번 라단조

지휘 | 함신익, 메조 소프라노 | 제인 더튼, 연주 | 대전시립교향악단
합창 | 대전시립합창단(여성), 서울레이디스싱어즈, 이화챔버콰이어, 셀라 어린이 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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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한 대전시향의 말러 공연을 보았다. 무리없이 시간을 맞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차가 밀린데다 예당 앞 횡단보도 신호가 너무 길어서 공연 시작 직전에야 간신히 입장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오 분 이상 기다리면서, '공연장 앞 횡단보도라면 대부분의 공연이 정시에 시작하는 점을 고려해서 50분 쯤에 녹색등을 켜 주면 좋을 텐데' 싶었다. 대영박물관 한국전을 관람하러 온 학생들이 아주 많았다.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이런 프로그램에서는 워밍업이란 느낌이 물씬 나는 선곡이다. 유명하고 쉬운 곡을 쉽고 편하게 연주하는 걸 들을 때면 마음이 놓이며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에는 프로그램에 모차르트가 있으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별 부담없이 듣게 되었다. 디베르티멘토같은 소품은 좋아하기도 한다. 따지자면 모차르트가 완성한 음악의 양식을 고전파라고 하니 그 음악이 고전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고전적이라서 (솔직히 표현하자면 '질려서')' 모차르트를 썩 즐기지 않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우스운 아이러니다. 내가 모차르트의 이름에 거부감을 느끼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여럿 있고, 아직도 모차르트만을 듣기 위해 공연에 가거나 씨디를 사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무심' 카테고리에 있던 것들이 '관심' 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느낌은 역시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들으며 말로만 듣던 그 유쾌한 천재성에 진심으로 감탄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는 오페라의 ㅇ자에도 흥미가 없다.)

디베르티멘토가 깔끔하고 경쾌하게 끝난 후 휴식시간, 그리고 오늘 공연의 메인 디쉬라 할 수 있는 말러 3번.

말러 3번은 총 6악장으로 구성된 데다 1악장이 30분 이상이나 된다. 전체 곡 길이에 대해 정확히 알아 두지 않고 대충 한 시간쯤 하겠거니 하고 덜렁덜렁 갔는데, 한 시간 반이나 되어 좀 놀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에 처음 들은 이 곡 자체에 굉장히 당황했다. -_-; 1악장을 들을 때의 내 심정은 한 마디로 '헉'. 곡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흐름이 있긴 한 것 같은데(그러니까 통채로 한 곡으로 묶었겠지), 너무나 독특하고 이질적이고......뭐랄까, 불균형적이었다. 무대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해도 이만큼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게다가 1악장은 그토록 무시무시했는데 2악장과 3악장은 어떻게 이렇게나 '정상적인' 거지? 들으면서 다음엔 대체 뭐가 튀어나올까 싶어 가슴을 졸였다.

4악장에서는 메조소프라노, 5악장에선 드디어 합창단까지 등장. 비교적 짧은 4악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한 가운데 메조소프라노의 독창으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나온다. 니체라니,이쯤 되면 이건 지구정복 교향곡 아닌가! 6악장이 듣는 이의 기(氣)를 뽑아가며 느릿느릿 끝났을 즈음에는 - 그렇다, 6악장에는 노래도 없고 폭발하듯 분출하는 포르티시모도 [아마] 없다. -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듣기도 이렇게 힘든데 연주하고 지휘하는 사람들은 오죽하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너무 힘들었다. 이런 곡을 작곡하다니, 말러도 세상 살기 참 피곤했겠구나 싶었다.

내가 멘델스존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전함'이다. 뜬금없는 말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시리즈를 즐겨 읽는 이유와 비슷하다. '너무' 가 없는 세계. 너무 비참하지도, 너무 우울하지도, 너무 과격하지도 않은, '오케이, 거기까지.'가 존재하는 세계가 주는 안전함과 온건함에 대한 환상이 멘델스존의 음악에는 - 그리고 마리미테에는; - 있다. 말러의 음악은 그 대척점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의 극한이 있다. 너무 격정적이거나, 너무 비참하거나, 너무 우울하거나, 때로는 너무 경건한 음악. 여기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어깨를 뻣뻣이 굳히고 두 다리를 딱 모아 붙인 채로, '단지 음악을 듣기 위해서' 각오를 다지게 만드는, 외면하고 싶을 만큼 무서운 검광이 있다. 그래서 나는 말러를 좋아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싫어해서도 무심해서도 아니다. 이런 곡을 듣고 '무심'할 수는 없다. 작곡가에 대한 예의 때문에라도, 이만한 교향곡을 듣고 '어, 그거 괜찮지', '좀 좋아해.' 같은 애매한 감상을 무책임하게 내뱉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만한 깊이를 감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전시향의 연주는 훌륭했다. 일단 이만한 규모의 곡을 처음 들으면서 연주에 신경쓰지 않고 - 아무리 모르는 곡이라도, 연주를 못 하는 건 못 하는 거라서 듣다 보면 거슬리게 된다 - 몰입할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좋은 연주였음은 짐작이 되리라. 독주 부분이 많았던 트럼펫도 좋았으나, 전체적으로 보자면 트럼본 주자의 연주가 제일 돋보였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후 지휘자가 트럼본 주자를 지명할 때 기립했다.) 대전시향에는 악장이 두 명인데, 모차르트 때에는 김필균 씨가, 말러 때에는 로드리고 푸스카스 씨가 악장 자리에 앉았다. 곡 때문인지 몰라도 푸스카스 악장의 연주는 화려하단 느낌. 금관 쪽 부담이 상당했을텐데, 끝까지 무사히 잘 버텼다. 메조소프라노 제인 더튼의 노래도 인상깊었다. 합창단의 노래는 이상하게도 중간중간 잘 들리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피로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좌석 위치와 관련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잘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종교적인 가사가 영 와닿지 않아서......) 참, 함신익 지휘자는 디베르티멘토 때 악보 없이 지휘했는데, 캐쥬얼한 인상을 주었다. (내가 그 곡 들을 때 까지만 해도 다음에 바위산이 나올 줄 몰랐지. OTL)

공연은 앵콜 없이 열광적인 박수로 끝났다. 공연장에서 나올 때는 '두 번은 못 듣겠다' 고 했으나, 집에 와서 곱씹어 보니 이 곡을 씨디가 아니라 실황으로 처음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5년 7월 8일 금요일

2005년 7월 8일 금요일


전션과 광화문에서 만나 점심식사를 했다. 사무실이 밀집된 지역이라 열두 시부터 한 시 사이면 어느 식당이든 붐비는 것을 깜박 잊고 딱 열두 시에 약속을 잡아 버렸다. 덕분에 원래 염두에 두었던 카페 이마의 아이스크림 와플은 먹지 못했다. (대기 손님만도 예닐곱 팀이 넘었다.) 대신 오랜만에 위치스테이블(Witch's Table)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5월 말부터 일을 시작했다는 전션은 벌써 직장인 태가 완연했다.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 공문을 보내야 한다기에, 얼른 일을 끝낸 다음 함께 삼청동에 가서 전시를 보기로 했다. 전션은 사무실에 들어가고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이 친구님께서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아니 나오시는 게 아닌가. 팩스 하나 보내겠다고 들어가서, 사회 초년생이 맞서기 어려운 심부름의 광풍을 맞는 바람에 그만......orz

미술관에 가기엔 이미 좀 늦어버려, 전션이 미안하다며 사 준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고 집에 왔다. 저녁에는 조부모님을 모시고 집에서 식사했다.

2005년 7월 7일 목요일

2005년 7월 7일 목요일 : Mr. & Mrs. Smith

오후에 어머니와 [몇 년 만에]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 갈 때 염두에 두었던 옷은 한 벌도 고르지 못했지만, 구경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밤에는 신촌 녹색극장에서 Mr. & Mrs. Smith를 보았다.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라는 제목은 영 입에 붙지 않는다. '스미스씨 부부'라고 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시험이 끝나기 전에 극장에서 내릴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집에서 가까운 신촌에서도 아직 상영중이었다. 평일 저녁 시간이라서인지 관객은 많지 않았다.

영화는 기대한 만큼 재미있었다. 권태기 부부가 거창한 부부싸움을 한 판 하고 다시 사이가 좋아지는 내용으로, 그레이트 졸리님께옵서 멋있게 나오셔서 만족했다. 브래드 피트도 귀여워서 균형이 잘 맞는 느낌.

집에 오는 길에는 홍대 한양문고에 들러 책을 몇 권 샀다.

2005년 7월 6일 수요일

2005년 7월 6일 수요일 : [잡기] 일상의 감각

이삼 주 전, 시험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몸이 영 좋지 않아 (그 얘기로 하자면, 시험이 끝난 지금 내 몸은 일 주일 내내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버텼던 게 거짓말 같을 만큼 멀쩡해졌다.) 그림자가 제법 짧아지도록 집에서 쉬던 때 얘기다. 가구 배치를 바꾸느라 줄자를 들고 이리 저리 재어 보시던 어머니께서, 어설프게 뒹구는 나를 보시곤 우리 딸 몸매나 어떤지 볼까, 하고 배에 줄자를 슥 두르셨다.

내 배로 말하자면, 좀 많이 먹었다 싶으면 쑥 나오고 안 먹었다 싶으면 쏙 들어가는 희한한 생김을 하고 있다. 하도 나왔다 들어갔다 하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몇 년 전에는 병원에서 검사를 해 보았는데, 의사가 복근이 너무 없어서 그래요, 하고 웃었다. 몸이 여릿해서 그렇지 다른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니 윗몸일으키기나 운동을 해서 근육을 키우란다. 그러나 운동을 한들 복근이란 게 쉬 생기지 않는데다 배가 한눈에 보아 이상할 만큼 불룩 나오는 것도 아니라 그냥 생긴 대로 지내고 있다.

어쨌든 그래서 자를 둘러 재어 보니, 아니, 분명히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갔거늘, 배가 나와 아랫배 둘레를 재나 윗배 둘레를 재나 그 좀 위를 재나 별 차이가 없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것은!

자를 들고 선 어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슬금슬금, 입가가 들릭랑 말랑 한다. 웃어도 되나 고민하시는 거죠? 나는 속으로 씩 웃고 멀끔한 표정으로 천연덕스레 입을 열었다. "이거 완전 원통이네요, 원통." 참았던 웃음보가 터지고 모녀는 말 그대로 바닥을 구르며 폭소.

며칠 뒤 거실에서 차를 마시다 문득 이 때 생각이 나서 슬쩍 웃었다. 왜 웃는 거니, 물으시는 어머니께 "원통." 이라고 한 마디 하고 또 둘이서 같이 큰 소리로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일상에서 이런 작은 재미를 뽑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문득, 이른 여름의 한가한 햇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절실히 생각했다.

2005년 7월 4일 월요일

2005년 7월 4일 월요일 : 고시생 잡담

정치학 시험 끝나고 중앙인사위에서 나눠준 설문지. 저 체크하고 싶어지는 보기들이라니! 웃을 처지가 아닌 와중에도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 와서 온 가족에게 읽어 주었다.

시험에 대해서는 : 시작은 좋았으나, 경제학에서 답안 작성 자체를 거의 하지 못해 과락(개별과목 기준점수 미달로 인한 자동탈락)을 각오하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아는 것도 다 못 쓰고 나오다니 이럴 수가 있나, 싶어 시험장에서 나오면서 훌쩍훌쩍 울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져서, '혹시 나, 울만큼 배가 고팠던 걸까'라고 생각했다. 최근 일 주일 여 사이에 몸무게가 2kg 줄었다.

이후 계획에 대해서는 : 6일 행정학을 마지막으로 시험이 끝난다. 독서실 자리는 5일에 정리할 계획이고, 9일에는 아우님과 대전시향의 모차르트 & 말러 공연을 보러 간다. 14일에 거울 단편선 교정 마감.
책은 하반기 중에 두어 권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