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30일 화요일

2006년 5월 30일 화요일


(아빠마마께서 엄마마마께 선물하신 장미화분)

부모님의 스물네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자정 즈음, 온가족에게 고른 지지를 받고 있는 파리바게트 치즈케이크에 초를 여섯 개 꽂고 손 잡고 아자아자 사랑해요 하고 케이크 쓱싹 자르고 와와 박수치고 냠냠 먹었다.

본래 5월은 행사가 많은 달이긴 하지만, 올 봄에는 다른 일도 겹쳐 케이크를 꽤 자주 먹었다. 지난 17일에 블루베리 쉬폰 케이크를 먹으면서 -

제이: (포크를 빨며) 30일 에는 치즈케이크 먹어요! 치즈케익~치즈케익~나는 치즈케익이 좋아좋아~
어머니: 결혼기념일에 [또] 무슨 케이크니.
제이: (헉) 아니, 결혼기념일이야말로 케이크를 반드시 먹어야 하는 날이죠. 우리 가족이 탄생한 날이잖아요. 우주적으로 보자면 저기 저 (발가락으로 책장의 과학잡지 코너를 가리키며 웅변조로) 비이익 배앵과도 같은 대사건이란 말입니다!
어머니:......먹어야겠구나.

지금 이 시간쯤이면 소연이는 벌써 있었을지도 몰라, 하는 어머니 농담에 같이 웃었다.

2006년 5월 20일 토요일

2006년 5월 20일 토요일

지구정복비밀결사 모임날이었다. 오늘의 정복 국가는 그리스. (지정사가 실은 '지구음식정복 결사'라는 비밀이 유출되고 말았더라.) 홍대 앞에 있는 그리스 음식 전문점 '그릭조이(Greek Joy)'에서 모였다. 동진님, 상현님 다음으로 도착해 보니 단체석을 ㄷ자로 배치하고 있기에, 흔치 않은 기회다 싶어 재빨리 대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보았다. 한가운데에 한 번쯤 앉아 보고 싶었단 말이지.

대장 자리


저녁 시간에 맞춰 동진님, 상현님, 강명님, 까리용님(+위스키 1병), 상훈님, 경아님, 명비님, 나 여덟 명이, 약간 늦게 scifi님과 파란날개임이, 그리고 여덟 시 넘어 라슈펠님, 서늘님, 정훈님, 야니님이 오셨다.

그릭조이에 3층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듣자하니 얼마 전에 문을 열었단다. 2층이 캐주얼, 3층이 정식 분위기. 전채 세 가지와 메인, 디저트, 커피로 이어지는 코스만 있다.


빵. 계속 준다.

연어 샐러드. (연어를 가장한 토마토가 많다.)

단호박.


수블라키

메인:치킨스테이크

메인:양갈비

디저트: 그릴에 구운 바나나와 무화과

식사가 굉장히 늦게 나왔는데, 원래 그런지 오늘 유별났는지는 모르겠다. 다섯 시 반에 주문했는데 메인이 나온 시각은 여덟 시 이후. 그 사이에 빵을 잔뜩 먹었다. - 따뜻하고 말랑말랑해서 자꾸 손이 가더라. 빵 및 양갈비 등과 같이 먹을 올리브/가지/요거트 소스를 내어 오는데, 올리브 소스와 가지 소스가 무척 맛있었고, 메인도 기대 이상이었다. 요리에 곁들여 넣는 소스의 양이 조금 과한 감이 있고 후식으로 주는 커피가 헤이즐넛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그 외엔 가격대 성능비를 보아 만족할 만 하다. 서버들이 아르바이트라기보다는 직원 같은 안정감을 주어서 편했다.

근래에 소설작법과 창작을 처음부터 정식으로 배우기 위해 여러 모로 궁리하고 있었는데, 마침 [요즈음 직접 강의를 하시는] 경아님 옆 자리라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경아님의 조언은 경험자의 실용적인 노하우를 담고 있고 고민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 주기 때문에, 늘 굉장히 도움이 된다. 오늘도 '이것이 바로 연륜이구나!'하고 새삼스레 감탄했다.

정복/출판/번역/만화/영화/정치/술/음식 등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화제도 제각각이었다. 아홉 시쯤 박근혜씨가 피습당했다는 연락이 받은 강명님이 먼저 나가셨고, 나머지 사람들도 아홉 시 반 쯤 일어나 장소를 옮겼다.(나는 귀가) 오랜만에 모여서 수다를 떠니 상쾌하고 신이 났다.

다음날(일요일) 새벽에는 독재국가인 프랑스가 배경인 꿈을 꾸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 독재는 아니고, 혁명전쟁 중 공포정치 시대의 분위기에 우리나라 80년대의 문화와 기술이 결합된 프랑스였다. 비합리적인 법이 많고 사회는 불안했다. 잠에서 깬지 한 참 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비합리적인 법의 백미는 '거리에 오랑우탄을 세 시간 이상 풀어놓으면 안 된다'.

2006년 5월 19일 금요일

2006년 5월 19일 금요일 :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제 28회 정기연주회

프로그램
모차트르/마술피리 서곡
모차르트/피아노협주곡 제20번 K.466
모차르트/교향곡 제3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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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서현석 Piano/이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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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양과 강남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에 갔다. 분수대 옆에 있는 카페 모짜르트에서 녹차라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공연장에 들어갔다. 아란양이 맛있는 다크 초콜릿을 잔뜩 주었다! 고마워하며 열심히 먹고 있다.

몇 달 만에 생음악을 들어서 기뻤다. 출입 제한 연령이 분명한 어린이가 앞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해도, 피아니스트가 확 깨는 미스터치를 내도, 플루티스트가 쉰소리를 내도 좋았다. ㅠ_ㅠ 스스로 '게걸스럽게' 듣고 있는 줄을 알겠더라. 악기를 배운다면 다시 피아노를 하는 쪽이 익숙해서 편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피아노는 역시 직접 연주하기보다는 듣는 편이 낫겠고, 드럼! 2학기에는 드럼을!

공연을 다 보고는 남부터미널 역까지 걸어 갔다. 우면산에 아카시아 꽃이 많이 피어 산바람이 무척 상쾌했다. 아란양과 신촌역까지 지하철을 함께 탔는데, 뜻밖에 사람이 많지 않아 편하게 귀가했다.

2006년 5월 15일 월요일

2006년 5월 15일 월요일

왜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보통 그냥요, 라고 한다. 전공을 선택한 이유 중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도 있고, 현실적인 것도 있다. 그러나 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라 한다면 그 질문에는 분명한 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 때문이다. 나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 그 중에서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우주를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중학생 때 였던가, 뭘 하고 싶느냐는 질문에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사람들 안 만나고 공부만 하고 싶어요.'라고 답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난달 25일 오후 6시쯤 경남 창원시 용호동 대한적십자사 경남지사 건물 4층 총무과 「북한동포와 밥 한그릇 나눠먹기운동」 접수처에 30대 초반의 부부가 함께 들어섰다.
이들은 1백만원권 수표 10장이 들어있는 하얀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놓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위는 이랬다. 그날 오전 10시쯤 경남지사 총무과에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성금을 내고 싶다』며 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금액과 신분을 알려주면 감사서한이라도 보내겠다』고 말한 공인배(공인배·37)대리는 『1천만원을 송금하겠다』는 대답에 깜짝 놀랐다. 『신분을 알고 싶다』고 했으나 이 남자는 『마산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데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성금만 보내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적은 돈이 아니어서 은행계좌로 받는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공대리의 말에 이 남자는 『그러면 오후 5시 학교수업이 끝나면 찾아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 익명의 교사가 십 년 전 내 담임선생님이었다. 담당자는 마지막까지 익명을 요구한 선생님 몰래 기자를 불렀고, 실제 성금이 접수된지 한 달 쯤 지나서 선생님의 사진이 지역 신문에 나오고야 말았다. 당시 기자를 피해 여관에서 자기까지 하며 취재를 거부하던 선생님에게 기자가 "이런 기사를 보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일을 할 동기가 생긴다."고 설득했다는데, 선생님은 정말 이런 말에 순수한 선의로 설득될 만한 사람이었다. 지역 신문 기자는 약속을 어기고 선생님의 실명을 실었다. 선생님은 굉장히 당황하셨지만, 그 기자 덕분에 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상당히 바뀌었다.

강원도 출신인 선생님이 마산에서 교편을 잡기까지의 과정은 '극심한 가난과 불우한 환경 극복'이라는 테마로 5부작 인간극장을 거뜬히 만들 만 한 이야기이다. 선생님의 형편은 결코 넉넉치 못했고, 갓 태어난 아이까지 있었다. 천 만원이라는 돈이 있지도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 선생님이 그 처지에 그만큼 저금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깜짝 놀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그 돈을 남을 주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라고 하면 남들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을 꼬박꼬박 냈다. 의무봉사활동을 가서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삶을 보고 오면 충격과 막연한 무력감에 울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그 모든 일을 말하자면 바깥 세상 이야기로, 내가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남의 일로 생각했었다.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고말고. 대단해.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성금을 내는 것도 좋겠지. 지금은 이 용돈으로 사고 싶은 책도 다 못 사는걸. 언젠가 시간이 나면 봉사활동 같은 걸 제대로 해 보는 것도 좋겠지. 지금은 바빠서 어려워.

반 아이가 신문에서 오려온 기사를 보고 나는 말 그대로 '경악'했었다. TV나 연말 신문에 가끔 나오는 '그런' 사람이 내 생활 속에 줄곧 있어 왔다는 깨달음은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허물었다. 그 즈음 나는 질풍노도였다고 할 만한 사춘기의 끄트머리에 서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제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사가 나왔을 때는 마침 부모님이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서울에 올라와 계실 때였다. (나는 부모님이 부재중이시란 사실을 선생님에게 말씀드리지 않았었다. 타인의 일에 도통 관심이 없던 내가 선생님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지금까지도 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전화로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선생님과 대화할 기회가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일은 내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분에 대해 하나의 보기를 제시했다. 마치 안경을 바꾸어 낀 듯, 갑자기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처럼 생활 속에서 지금 당장 무언가를 실천하는 수많은 사람들, 행동이 필요한 사회의 많은 문제들, 내가 갖고 있는 것들 - 사람 한 명 한 명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개인을 둘러싼 사회가 내가 늘 관심을 갖고 있던 '별과 별 사이를 채우는 무엇' 만큼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찾아왔다. 책에서 수없이 읽으며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기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상이 펼쳐졌고, 일단 보기 시작한 이상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종교에 귀의하거나 즉시 진로를 바꾸지는 않았다. 내가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한 것은 이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고, 나는 점점 더 독실한 무신론자가 되고 있다. 갑자기 '원만한' 성격이 되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어려워하고, 평생 공부를 하며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삶이 상류에서 아주 조금만 꺾여도 하류에서는 처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 강과 같은 것이라면, 나는 그 꺾임이 일어났던 자리를 십 년 전 그 때로 정확히 짚을 수 있다.

도저히 전공이 성격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자괴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이도 저도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히거나 내가 받는 것의 백분의 일도 도로 내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자각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돌에 새기듯이 한 글자 한 글자 마음 속으로 읊는다. -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얼마 전에는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여겼던 사람으로부터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한 말을 듣고 무척 마음이 상했었다. 돌이켜 보니 아주 오래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때와 지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에 대해 그토록 잘 아는 사람이 내가 한 일을 잘못 판단한다면 그것은 그의 판단 실수라기보다는 내가 기대/예상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내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할 수 없는 일과 하지 않은 일, 투입과 산출을 정직하게 판단했던가. 똑바로 눈을 뜨고 나와 타인을 보았던가. 자문하다 보니 감정이 풀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우며 결심한 대로 살고 있는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고 있는가.

2006년 5월 13일 토요일

2006년 5월 13일 토요일

오전에는 학교에서 실습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올해 여름/2학기 실습생은 서른네 명인데, 실제 오리엔테이션에는 스무 명 정도 왔다. 동기 중에선 은영이가 참석해서 반가웠다. 그 외에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실습 기관이 정해진 상태라, 그 실습 기관을 결정한 이유와 실습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돌아가며 말했다. 이봉주 선생님이 실습 원칙과 관련 사항, 진행 과정에 대해 조언해 주셨다. 다들 이유도 결정 과정도 기대하는 바도 관심사도 다양해서 두루두루 들으니 무척 재미있었다. 실습을 시작하면 매주 세미나를 한다는데, 기대가 크다.

자하연에서 이봉주 선생님이 사 주신 점심을 먹었다. E양이 입양을 하고 싶다며, 현실적으로 최소한 '개인'의 삶은 구할 수 있으리라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나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저 감탄했는데, 곰곰 되새기다 보니 내가 [특히 요즈음] 갖고 있는 여러가지 고민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서울대입구 소렌토에서 휴가 나온 인수오빠를 만났다. 소렌토는 점심 메뉴를 없애고 전체적인 메뉴 구성을 바꾸었던데, 이미 점심을 먹은 터라 식사를 하지 않아 맛은 모르겠다.

식후에는 별다방에서 폴라로이드를 가지고 놀았다. 어버이날 이후로 줄곧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었는데,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말 하고 나니 조금 편해졌다.

피곤해서 집에 일찍 왔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2006년 5월 8일 월요일

바쁜 하루였다.

오전에는 H회에 가서 면접을 보았고, 점심에는 B사에 가서 맛있는 영양삼계탕을 먹은 후 기획 관련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에 맞지 않는 구두 때문에 힘들어서 일단 귀가, 집에서 잠깐 쉰 후 오후 네 시쯤 동생과 함께 조부모님 댁에 갔다. 다른 친척분들도 몇 분 계셨다. 케이크와 카네이션을 드리고 잠시 있다가 아버지와 교대해서 나왔다.

저녁에는 용진군과 아지바코에 가기로 했었다. 약속 시간 사이가 약간 비어 한양문고에 잠시 들러 책 구경을 하고 만화책을 몇 권 샀다. 대충 시간이 되었다 싶어 이대 앞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아 래핑을 뜯었는데, 에잇, 파본이 아닌가! 게다가 인쇄상 파본이 아니라 책장이 죽 찢어진 파본이었다. 당장 교환하지 않으면 귀찮아 질 것 같아 신촌에서 내려 홍대 앞으로 돌아가 책을 바꿨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탔는데 용진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진님이 아 따블르에서 식사하자고 했으니 광화문으로 가잔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나는 일정이 갑작스레 바뀌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이대 앞에 도착해 보니, 기다리고 있던 용진군이 아 따블르는 자리가 없으니 다른 데 가야 한단다.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 아지바코에 가려고 했으나 - 정기 휴일이었다. -_-

중략하고 여덟 시 반 쯤 용진군, 동진님과 이대 후문 쪽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작은 프랑스'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프렌치가 아니라 '한국식 양식'이라는 느낌이었다. 요리로 보아서는 어버이날에 붐비기 딱 좋은 레스토랑이던데 뜻밖에(?) 한산하고 조용해서 이야기하며 천천히 식사하기에는 괜찮았다. 금/흡연석 구분은 따로 없는 듯.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먹었으나, 그 와중에도 용진군에게 삶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하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늦게 시작한 터라 식사를 마치자 마자 일어섰는데도 열한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집에 와서는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안방에 옹기종기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쉬었다. 혈연은 애정이 없을 때에도 관계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렵다. (오늘 만난 소설가 S님은 '서로 안 친한 친척끼리 모여 봤자 결국 싸움 밖에 안 난다.'고 하셨다.) 우리 식구는 서로 사랑해서 정말 다행이다.

2006년 5월 1일 월요일

2006년 5월 1일 월요일 : 막상막하

어머니와 둘이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전략)
제이: 그건 그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던 부분도......
어머니: 내가 그렇게 고리짝 시대 사람은 아니다, 여보야.
제이: 푸헬~저는 여보가 아니라 동생이거든요?
......아니, 동생?! 이게 아닌데?!?!
어머니: (대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