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28일 수요일

2007년 3월 28일 수요일 : 우산과 시야와 타이밍

날이 궂다. 낮에는 잠깐이니 괜찮겠지 하고 빈 손으로 나섰다가 때맞춰 떨어진 우박을 제대로 맞았다. 저녁에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산을 들고 나갔다. 우산을 든 사람과 들지 않은 사람이 적당히 섞여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들어 머리 위를 슥 쓸어 본다. 물기가 없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우산을 접을 때를 알기란 뜻밖에 어렵다. 비가 오다 말다 하거나, 부슬비가 내리다 서서히 그친 경우에는 더 그렇다. 나처럼 줄곧 실내에 있다 실외로 나온 사람들은 실수를 잘 하지 않지만, 비가 올 때 실내에 들어갔다가 금세 나온 사람들은 무심코 우산을 펴는 경우가 많다. 좁은 골목에서는 앞서 가는 두세 명이 비가 그친 줄 모르고 걷는 뒤로, 다른 사람들까지 줄지어 우산을 든 채 가는 모습도 보인다.

우산을 제때 접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특히 나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있는지 아닌지,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가 빗방울로 흔들리는지, 우산에 물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지, 코끝에 스치는 공기가 얼마나 축축한지에 신경을 조금만 쓰면, 굳이 우산 밖으로 손을 뻗지 않고도 비가 그치는 순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산을 접을 때를 알기란 어려운 일이고, 다른 많은 일들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더 어렵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우산을 접고 한 자리에 잠시 서 있어야만 비가 그쳤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반면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득달같이 우산을 펴는 일을 어려워 한 적은 없다. 나는 비와 장마와 날씨에 관한 많은 우리말 단어를 수첩에 써 두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며 외웠다. 그럼에도 같아지지 않은 내 우산을 펴는 속도와 우산을 접는 속도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부끄러워진다.

2007년 3월 17일 토요일

2007년 3월 17일 토요일 : 빔 밴더스 특별전 - 파리, 텍사스(Paris, Texas) /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

오늘은 스폰지하우스의 [빔 밴더스 특별전] 프로그램으로 그의 84년 작 [파리, 텍사스(Paris, Texas | color | 148)]와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 | 1987 | B&W, color | 128)]를 보는 날이었다.

날씨가 좋기에 홍대 앞 카카오 봄(Cacao Boom)에 가서 비상식량으로 바크초콜릿을 사고 - 3월 말까지 스트로베리 페어를 한다더라. 정말 맛있어 보이는 딸기디핑초콜릿, 산딸기와 블루베리 초콜릿 등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싫어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기사님이 찬양방송을 커다랗게 틀어 놓아서 30분 동안 계속 찬송가를 듣느라 무척 괴로웠다. 중간 중간 DJ의 장중한 코멘트도 있었는데, 내가 내릴 때쯤 "믿음 없는 자와 마지막으로 교제한 것은 언제입니까? (중략) 믿음 없는 자에게 마지막으로 기쁨의 말씀을 전한 것은 언제입니까?" 라는 마지막 인사가 나왔다.

......범인은 너냐! -_-

버스에서 내리니 왠지 허유마냥 어딘가 씻고 싶어졌다. 뎀셀에 들어가 손을 씻고 아이스 셰이킹 에스프레소를 마신 후, 다섯 시가 되기 조금 전에 스폰지하우스로 갔다. 그런데 앞 프로그램인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GV 일정이 지연되어 [파리, 텍사스]의 상영도 덩달아 밀려, 20분이 지나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대신 원래 GV가 없는 [파리, 텍사스] 상영 전에 감독님이 잠시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입장을 하려다 보니 아뿔싸, 감독과의 대화가 있는데 필기구를 전혀 준비하지 않고 덜렁 왔잖아! 잠깐 좌절했으나 아우님에게서 빌린 녹음기능 있는 MP3P가 가방에 들어 있었던 것이 떠올라 다행히 GV를 모두 녹음할 수 있었다.

아, 지금 생각났는데, MP3P가 있었으니 버스에서도 꾸역꾸역 괴로워하지 말고 그냥 [Doctor Who]를 복습했으면 되었네.;

여하튼 그래서 [파리, 텍사스] 상영 전에 잠깐 감독님 말씀을 들었다. 아주 잠깐이라 영화에 대해 들은 다음, 감독님이 질문을 딱 하나만 받겠다고 하셨다.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고 감독님이 한 사람을 지명했는데, 그 사람의 질문이 "독일 사람이시죠?" 였다.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가 상영관을 메웠다. 나는 그나마 [베를린 천사의 시] GV를 기다리고 있었고, 별달리 질문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 괜찮았지만, 마음 속에 꼭 하고 싶은 질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정말 허탈했겠더라. 사실상 무의미한 질문이라 통역인이 알면서 물으셨냐고 확인하자, 독일어로 말하는 것이 들어 보고 싶어서 그랬단다. 그 말을 들으니 저 질문이 처음만큼 황당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77년 이후 30년 만에 한국에 온 좋아하는 감독에게서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Ich heisse Wim Wenders....'를 듣고 돌아간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파리, 텍사스]는 처음 보는 영화였다. 제목과 줄거리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이 여럿 있었고, 영화를 보면서도 초반과 중간 중간에 너무 명백하게 '본 적 있는' 장면이 나와서 헷갈렸으나, 뒤로 가니 첫 관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봤다면 잊었을 리 없는 영화였다. (범인은 EBS의 뉴저먼시네마 프로그램이었던 듯.)

전반적인 상영 지연으로 인해 [파리, 텍사스] 크레딧이 끝나자마자 전력으로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러 들어갔다. 이번 상영은 매진이었단다. 스크린으로는 재작년 유럽영화제 이후 두 번째였다. 몇 번을 봐도 너무나 훌륭하다. 그 공간감과 고양감, '본다'는 행위 자체의 존재감,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는 느낌-볼 때마다 새로이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나는 도입부와 도서관 장면(아찔하다), 콜롬보 형사가 나오는 부분, 인간이 된 천사가 처음 세상을 경험하는 장면, 거의 끝에서 남은 천사가 닉 케이브 공연장의 벽에 기대 서 있을 때의 그림자 움직임을 특히 좋아한다. 이 영화의 시점샷도 특기할 만 한데, 역시나 감독과의 대화에서도 이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감독이 컬러 장면들을 자세히 보면 실수가 있다고 해서 놀랐다. 완벽해 보였는데!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그 이야기 자체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언제이고 어디이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순간부터 뭔가, 내 인생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로드무비'라고들 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늘 담겨 있는 그 느낌이다. (출생, 졸업, 결혼, 부모의 사망 같은) 명백한 분기점에서 시작을 말하기란 쉽다. 허나 이미 계속되어온 날것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살아 있기 때문에 몇 번이고 '시작' 할 수 있는 순간들을 짚어내고, 그 시작이 필요로 하는 끝을 말하는 동시에 삶의 존재감을 고양시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리, 텍사스] 역시 그런 영화였다. 이미 흘러온 삶 한복판에서 말하는 헤어짐과 만남, 끝과 시작의 이야기.

감독은 [파리, 텍사스] 상영 전 짧은 시간에 그 영화가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슬픈 사랑이야기이고 그 영화를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부럽다고도 했다. 스크린에서 제대로 볼 기회를 얻어서 정말 기뻤다.

[베를린 천사의 시] 질문시간에 나왔던 얘기 중에 놀라웠던 점은, 그 영화에 대본(script)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페터 한드케가 참여하기도 했으니, 나는 당연히 철저한 시나리오 작업이 있었을 줄 알았는데, 사실 그냥 아이디어와 찍고 싶은 장소들만 생각한 상태에서 매일 촬영을 하고 그날 밤에 다음 날 무엇을 찍을지 조감독과 상의하며 진행했었단다.

콜롬보 형사도 처음부터 출연이 정해져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저렇게 즉흥적으로 이주일 쯤 잠 못 자며 찍다보니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단다. [베를린 천사의 시] 주인공들은 천사인데, 그렇다 보니 계속 지나치게 진지하기만 해서 - 그게 직업이니까! - 재밌고 생동감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누구나 알아보는 인물을 전직 천사로 등장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누구나 알아볼 만한 사람이라면 운동선수나 정치인 정도가 있을 터인데, '정치인이 전직 천사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테고' 그렇다면, 미국인 영화배우가 가장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터라 하여 여차저차 콜롬보 형사가 나왔다.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ueber Berlin)]이라는 원제가 영어로는 [Wings of Desire]가 된 사연도 재미있었다. 저 제목이 독일어로는 운이 딱 맞는데, 프랑스어나 영어로 직역하면 어감이 엉망진창이었단다. 'The Sky of Berlin'이라고 하면 전쟁 영화나 일기예보 같으니까. 결국 계속 제목을 정하지 못한 채로 홍보를 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기가 와서 프랑스인 제작자가 독촉전화를 했을 때 문득 [Wings of Desire]라는 말이 떠올라 농담으로 얘기했는데, 그만 그렇게 결정되었단다. 우리말 제목인 [베를린 천사의 시]는 일본 개봉시의 제목을 직역한 것이라 한다.

다섯 시간 이상 초콜릿만 몇 조각 먹으면서 영화관에 계속 앉아 있었더니 몹시 피곤했지만(그리고 집에 와서 콘스프 등 잡다한 먹을거리를 대충 먹었더니 일요일 오전에 배가 아파 고생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정말 행복하고 두근두근한 하루였다. [빔 밴더스 특별전]은 종로 3가에서 3월 28일까지 한다.

2007년 3월 12일 월요일

2007년 3월 11일 일요일 : 킴 카쉬카시안 & 로버트 레빈 듀오 리사이틀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비올리스트 카쉬카시안과 피아니스트 레빈의 리사이틀에 다녀왔다. 지난 달 초에 뒤늦게 예매를 하려고 보니 이미 자리가 거의 다 나가 있었다. 그 때부터 포기하지 않고 시간 날 때마다 취소석을 노린 덕분에 결국 썩 괜찮은 좌석을 구해 편안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실내악 공연! 공연은 다섯 시 시작이었지만, 네 시 오십 분 부터 로비에서 잠깐 공연을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 시간에 들은 비올라 유머 한 토막:
"비올라 솔로와 죽음의 공통점은?"
"다가오는 것이 두렵지만 막을 수 없다."

==프로그램==
베토벤_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은’ 주제에 의한 7개의 변주곡 WoO 46
클라크_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쉬는 시간-
다케미쓰_A bird came down the walk for viola and piano
브람스_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Eb장조 Op.120 No.2

오늘 프로그램은 모두 처음 듣는 곡이었다. 생각보다 피아노의 비중이 높은 진짜 '듀오' 리사이틀인 점이 조금 예상 밖이었다. 베토벤의 곡은 비올라+피아노 버전은 처음이었지만 원곡이 워낙 유명해서인지 친숙했다. 레베카 클라크의 소나타는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하므로 중략)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프로그램에 두 연주자의 사인을 받았다. 바로 뒤 동문회 시간 때문에 신경이 쓰였지만 공연이 워낙 좋았고, 비올리스트의 리사이틀이 과연 언제 또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 공연이 끝나자마자 열심히 달려나가 줄을 섰다.

사인을 받은 다음에는 곧장 홍대 앞 치뽈리나로 가서 서울대 백신고 동문회를 했다. 신입생 셋 중 두 명이 왔고, 얼마 전에 결혼했던 형기 오빠도 신혼인데도 나왔다. 그리고 지현, 두현, 대영, 채우, (2주 전에 제대한) 태준이 참석했다. 두현은 만화 [신의 물방울]에 단단히 심취해 있더라. 아홉이서 피자 다섯 판을 먹고, 종우 오빠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칵테일 바 파가니니에 갔다. 나는 골드메달리스트라는 무알콜 칵테일을 마셨다. 형기 오빠는 정중앙 자리에 앉아 꿋꿋이 핫초코를 주문했다. 부양가족의 힘인가!

(아무래도 저녁이 걱정되므로 또 중략)

대화가 어쩌다 그리 흘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두현이 종로에서 트렌스젠더를 보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새내기들이 무심히 거북하다는 듯이 말하기에, 순간 울컥해서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지만 타인에게는 중요한 어떤 이슈에 대해서 근거 없이 싫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자기 안에 이미 어떤 헤게모니......"어쩌고 하다가, 대학에 들어온지 이제 열흘 된 애들을 붙잡고 술자리에서 헛소리하는 나이 많은 선배(더욱이 혼자 술 한 방울 안 들어간 정신상태로)가 된 기분이 들어서 곧 그만두었다.

오랜만에 동문회 후배들을 만나니 반가웠다. 대학 입학한 이래 늘 의지가 되었던 종우 오빠가 이번 15일에 공보의로 입대를 한다. 어디로 배치될지 아직 모르지만, 설령 운 좋아 서울 가까이에 근무하신다 해도, 삼 년이나 보건소에서 지내시리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본인은 더하시겠지.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즐거웠다. 다음 주말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빔 밴더스 특별전]이다. 감독과의 대화가 딸린 [베를린 천사의 시] 예매좌석이 스크린에 상당히 가까워 기대가 크다.

2007년 3월 10일 토요일

2007년 3월 10일 토요일

y님, k님, p님과 이태원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라 씨갈 몽마르뜨(La Cigal Montmartre)'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홍합요리로 유명한 곳으로, 홍합만으로 유명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넷이 가서 전채로 어니언스프를 먹고, 크림소스, 왕새우커리소스 홍합을 주문해 먹었다. 1차 폐총 패총을 치우고, 크레이지 홍합(메뉴명과 달리 샐러리 등이 들어간 맛은 매우 깔끔하고 정상적이다)과 스튜를 추가로 주문해서 또 패총을 만들었다. 카메라를 깜박 잊고 갔는데, k님이 사진을 찍으셨으니 나중에 올라오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니언 스프는 괜찮았고, 홍합은 맛있었다. 마지막에 주문한 크레이지홍합이 시원하니 제일 맛있었지만, 상당한 모험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문했던 왕새우커리소스 홍합도 생각보다 무던했다. p님은 처음 뵙는 분이었는데, F지 분이라셔서 깜짝 놀랐다. F지 사무실에 여러 번 갔는데도 사석에서 처음 만나다니, 아핫.

홍합은 맛있었지만 너무 시끄러워서 앉아서 대화하며 식사를 즐길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이나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실내 매장은 넓지 않지만, 테라스석이 넓으니 날이 풀리면 지금처럼 붐비지는 않을 듯 하다.

식후에는 택시를 타고 압구정으로 갔다. 가루(GARU)에서 케이크를 사서 위 카페로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가루가 저녁 9시에 문을 닫아서 - 우리가 도착한 시각이 9시 40분 정도였다 - 부득불 위층에 있는 카페 모우(Cafe MOU)에서 케이크와 커피를 주문해 들었다. 모우는 높은 천정으로 유명한 카페이다. 드라마나 화보를 많이 찍은 곳이라는데, 낮에 보면 꽤 멋있을 것 같았다. 커피는 슬픈 맛이었지만, 가루 케이크는 역시나 맛있었다.

자리가 늦게 시작했던데다, 오랜만에 만난 y님과 k님, 그리고 처음인데도 불편치 않았던 p님과의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열한 시가 넘어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나머지 분들은 k님이 아시는 와인바에 가셨다.

http://cool120p.egloos.com/3057045 k님의 사진이 올라왔네.

2007년 3월 9일 금요일

2007년 3월 9일 금요일 : 광고와 식욕과 타이밍

금요일이라서인지 한산하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오랜만에 들어온 메신저에 사람이 없다. 노트북에서 쓰던 글을 USB에 옮겨 왔으나, 이 곳 컴퓨터가 내 USB 메모리 카드를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YTN 오늘의 주요뉴스를 보면서 식사를 한다. '오늘의 주요뉴스'란 본방송 중에 화면 하단에 한 줄로 흘러가는 뉴스를 말한다. 국내 정치 소식, 국내 사회 소식, 국외 소식, 스포츠 소식, 날씨 예보가 순서대로 나온다. 기사거리 하나가 열 다섯 자 정도이다. 기사 제목만 잘라 넣은 형식이다 보니 가끔은 내용이나 주어를 짐작할 수 없는 소식이 섞여 있을 때도 있다. 한 끼 먹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서너 번 정도 볼 수 있지만, 고개 드는 타이밍을 놓치면 식사 내내 국내 사회 소식만 보거나 해외 스포츠 소식만 거듭 보기도 한다. 점심 때와 저녁 때의 보도 내용은 거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제는 기상이변에 대한 국외 소식이 나왔다. 그 짧은 토막기사는 '중국의 티베트'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식사를 하는 동안 더 이상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간을 잘못 맞추면 광고를 볼 때도 있다. 케이블(혹은 유선) 방송의 광고는 제법 길기 때문에, 한 끼 먹는 내내 광고만 보는 일도 생긴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지역 산낙지 전문점 광고가 나온다. 여자 성우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앗, 뜨거, 앗 뜨거!' 하고 말하고, 눈코입이 달린 - 코는 빨판이다 - 낙지 일러스트가 전면에 등장한다. 식욕 저해에 그만이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러 가기란 쉽지 않지만, 나는 최소한 저 산낙지 전문점 광고만큼은 피하기 위해 제법 애를 쓰고 있다. 그 덕분에 요즈음 가장 자주 본 광고는 친구가 엄청나게 많은 삼성금융 고객 모모모씨의 결혼식 사진 촬영 장면과 세상을 바꾸는 에스케이텔레콤의 모모모 대학생 자원봉사자의 도시락 배달 장면이다. 삼성금융 고객 모모모씨가 나오는 광고를 볼 때 마다, 나는 신부가 조금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모모 자원봉사자가 나오는 광고를 볼 때 마다, 나는 그것이 연출된 장면임을 잘 알면서도, 화면 안에 들어가 그 대학생이 휘두르는 도시락 가방을 두 손으로 바로 받쳐 주고 싶어진다. 매번 그 생각을 했더니, 이제 그 휘둘리는 도시락 안에서 섞여 버렸을 반찬들을 연상하게 된다. 축축한 콩나물 무침과 (기름기가 남은) 고추장 제육볶음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하다 보면 또 식욕이 없어진다.

가족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으나, 저 두 광고를 제대로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지인 두 사람에게도 말을 꺼내 봤으나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가 끼니 때마다 텔레비전을 본다고 해도 합해서 한 시간이 채 안 될 터인데, 말을 하다 보니 내가 텔레비전을 가장 오래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왠지 식욕을 떨어뜨리는 텔레비전 광고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고개 들기, 수저 들기의 타이밍 하나 맞추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7년 3월 4일 일요일

2007년 3월 4일 일요일 : 여자를 유혹하는 요령

정오에 오랜만에 전션과 만났다. 전션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뎀셀에서 조각케이크와 커피를 샀다. 오랜만에 만나 더없이 반가웠다. 여름이 오기 전에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세 시쯤 먼저 일어나 -일이 바쁜 전션은 일요일인데도 작업거리가 있다며 남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리처드 레스터(Richard Lester) 감독의 1965년 작 [여자를 유혹하는 요령(The Knack...and How to Get it, 85min, 영국, B&W)]을 보았다.  

혹시라도 유용한 팁을 얻을 수 있을까 조금 (정말 아주 조금!) 기대했었는데, 영화는 [여자를 유혹하는 요령]보다는 [미친 60년대를 얼빠진 청춘답게 살아가는 요령]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이 좋았고, 침대를 이용한 재기와 중간중간 등장한 자막도 재미있었다. 아, YWCA도! 하지만 뒤로 갈수록 너무 '프리'해져서 - 이 영화는 '영국 프리시네마 특별전' 프로그램이다 - 나중에는 조금 감당하기 힘들었다. 참, 그리고 시네마테크의 영화 소개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나흘동안 영화를 세 편 봤는데, 그 중에 가장 현실적인 작품이 마술용 중국 상자 속에서 죽은 기자가 물질화하는 [스쿠프]였다.; 균형감각을 맞추기 위해 2일에 보던 [Doctor Who] 에피소드 [Rise of the Cyberman](현대 런던 상공에 비행선, 죽었던 아버지가 사업가, 모두들 귀에 꽂은 이어피스earpiece로 정보를 다운로드, 사이보그....)를 일단 통과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는 195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The Idiot's Lantern]를 보기로 마음 먹었다. '식민지'가 여전히 존재하고, 흑백 텔레비전을 들여 놓는 집들이 생겨나며,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 하던 할머니가 "그거 보다간 바보가 된다"며 잔소리 하고, 텔레비전 안테나를 통해 외계인들의 전파가 사람들을 공격(?)하고, 당한 사람들은 뇌가 없어지고 이목구비가 사라지고, 얼굴이 살색 원판이 된 사람들이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창고에 보관되는 역사물이었......어라라? 

2007년 3월 3일 토요일

2007년 3월 3일 토요일 : 수면의 과학


압구정 스폰지하우스에서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5년 작 [수면의 과학]을 보았다. [이터널 선샤인]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때문에 유럽영화제 상영작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볼 생각이었으나, 유럽영화제 예매전쟁에서 처참하게 실패한 이후 줄곧 기회가 없었다. 이미 상영이 끝났을 줄 알았는데, 빔 밴더스 특별전 때문에 들어간 스폰지하우스 홈페이지에서 아직 상영목록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얼씨구나 했다.

사실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영화를 전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이 '영화를 못 봐서 몸이 아플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관 뿐 아니라 공연장에도 전혀 못 갔고 지인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기 떄문에 상태가 악화되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2월 중순에는 영화가 보고 싶어서 잠을 못 들기까지 했다. 그새 [Doctor Who] 에피소드는 두어 편 봤는데, 재미있었지만 영화적인 갈증을 해소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더라.  

[수면의 과학]은 아버지가 죽은 후, (이혼했던) 어머니의 부름으로 주인공 스테판이 프랑스에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머니가 소개해 준 달력 회사에 각 달의 세계적 재난을 소재로 한 달력 그림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가 보지만, 실제로 맡은 일은 누드 달력의 (누드 사진 편집도 아니고) 상단에 홍보 로고를 집어 넣는 지겨운 단순작업이다. 중략하고 옆집 스테파니를 좋아하게 되지만 꿈과 현실을 혼동하여 자꾸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 철없는 스테판을 이해하기란 스테파니에게 너무 어렵다.

줄거리보다도,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스테판의 몽상을 영상화한 장면들 자체가 즐거웠다. 휴지 속통으로 만들어진 기차와 골판지 차, 셀로판이 펄럭거리는 바다, 가벼운 솜 구름과 폭신폭신한 타이프라이터며 전화기 등 상품화된다면 사고 싶은(...) 아이템이 많았다. 스테판은 굉장히 유치하고 철없는, 겉만 어른이지 속은 딱 열네 살 사내아이같은 인물이었다. 짜증스러울 수 있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살려 낸 주연 배우의 역할 해석에 감탄했다. 정말 조금만 어긋났으면 "뭐 저런....." 하면서 영화관을 나섰으리라.

[이터널 선샤인] 보다 '이야기'로서의 밀도나 감성은 많이 떨어지는 영화였다. 그럼에도 웃으면서 재미있게 보았고, 이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은 들지 않지만 공드리 감독의 다음 작품에는 여전히 조금 기대하고 있다.(하지만 다음 작도 이 정도라면 생각을 달리하게 될 듯.) 영화관을 나서고 나서도 한참 몽롱한 기분이었다. 걷다 말고 쎄씨 어쩌고 하는, 벌써 상호를 잊어버린 와플 전문점에 충동적으로 들어간 것도 영화 때문이었다 싶다. 상당히 선곡을 잘 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샛노란 천막에 하늘색 나무문으로 된 곳이었다. 맛과 가격은 (흠잡을 데 없지만 미묘하게 비효율적인 점이) 딱 그 동네 다웠다.

덧: 명함을 가져 왔었군. 와플집 상호는 'Ceci Cela'. 케이크 집 가루(Garu) 근처에 있다.

2007년 3월 1일 목요일

2007년 3월 1일 목요일 : 스쿠프 (Scoop)

우디 앨런이 2006년에 영국에서 찍은 영화. 스칼렛 요한슨과 휴 잭맨을 전면에 내세웠다. 갓 개봉했을 때만 해도 "우디 앨런이 남주 1 이 아닌 우디 앨런 영화는 내키지 않아!" 라고 생각했는데([매치포인트]를 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80년대 앨런 영화를 당장 트는 곳이 없어서 그냥 보러 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우디 앨런의 비중이 높았고, 앨런 특유의 입담이 스칼렛 요한슨이 맡은 산드라의 대사에서도 상당 부분 살아나서 굉장히 즐거웠다. 우디 앨런이 어설픈 표정으로 마술을 선보이는 도입부부터 대폭소했다. 저승으로 가는 배 장면의 감각도 유쾌했다. 이하 스포일러 한 문장. 보통 사람이 죽는 영화는 못 보는데, 어째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 사실 살인자였던 휴 잭맨보다 오히려 비중이 컸다. - 우디 앨런이 죽었는데도 찜찜하지 않고 웃음이 났다. 우디 앨런 영화이기에 가능한 감상이구나 싶었다.

스폰지하우스에서 3월 15일부터 28일까지 하는 [빔 밴더스 특별전] 상영안내문이 있기에 집어 왔다. 하루에 사 회차씩 상영하는데 회차순 시간표는 나왔지만 상영시간과 관객과의 대화 시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더라. 사인 같은 건 못 받아도 좋으니까 감독님 얼굴을 반경 100m 안에서 보고 그의 영화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를 본 후에는 동진님과 종각역 근처에 있는 커피집 '커피친구'에 갔다. 맛있다는 커피집에 가서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이번에는 처음부터 기대를 낮춰 잡고 갔는데 뜻밖에 굉장히 맛있었다. 이디오피아와 블렌드를 마셨는데 둘 다 훌륭했고, 특히 이디오피아는 "이렇게 맛있는 이디오피아라니, 얼마만인지......"하고 감동하면서 마셨다. 홍차는 있지만, 케이크 같은 사이드메뉴는 없다. 더치 커피도 한다.

커피를 마신 다음에는 청계천 근처에 있는 '파리크라상 키친'에서 저녁을 먹었다. 갓 생겼을 때 지나가면서 보고 한 번 들러 봐야지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실제로 가 봤다. 파리크라상이 레스토랑업에 진출하려고 만들어 본 곳 같은데, 양식 전반이랄까, 파스타/피자/스테이크/각종 샐러드/샌드위치/와인 등을 취급한다. 메뉴는 상당히 난잡해 보이지만 화덕까지 갖추어 놓은 분위기는 꽤 본격적. 저녁 세트가 있지만 시간이 되지 않아 (6시부터다) 단품으로 크렌베리과일 샐러드, 안심스테이크, 와인치킨스튜를 주문했다.

과일 샐러드는 소스가 조금 달았지만 괜찮았다. 와인치킨스튜도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외양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 무난하게 만족스러웠다. 조금 덜 달았으면 싶기는 했다. 그런데 서버가 "드셔 보신 분들이 다 만족하셨다"며 권하기에 반신반의하며 고른 안심스테이크가 확실히 맛있었다. "사실 전혀 기대 안 했는데, 이게 왠일이람- 빵집 스테이크가 정말로 맛있잖아!" 가 솔직한 감상이다.  

시간대 별로 점심 식사 메뉴와 저녁 식사 메뉴가 따로 있고, 그 사이인 오후 두 시 부터 다섯 시 사이가 (왜인지는 몰라도 '티타임'이 아니라) '브런치' 메뉴다.

저녁에는 빈둥빈둥 하다가 잠들었다. 새벽 세 시 쯤에 전화벨이 울리고 아버지가 거실로 나오셔서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이런 시각에 전화가 오면 아무래도 좋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다.- 궁시렁거리며 욕을 하더니 뚝 끊어지는 장난 전화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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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이 날은 영화/커피/식사 모두 '기대보다 만족스러운' 하루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