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3일 토요일

2007년 3월 3일 토요일 : 수면의 과학


압구정 스폰지하우스에서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5년 작 [수면의 과학]을 보았다. [이터널 선샤인]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때문에 유럽영화제 상영작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볼 생각이었으나, 유럽영화제 예매전쟁에서 처참하게 실패한 이후 줄곧 기회가 없었다. 이미 상영이 끝났을 줄 알았는데, 빔 밴더스 특별전 때문에 들어간 스폰지하우스 홈페이지에서 아직 상영목록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얼씨구나 했다.

사실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영화를 전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이 '영화를 못 봐서 몸이 아플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관 뿐 아니라 공연장에도 전혀 못 갔고 지인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기 떄문에 상태가 악화되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2월 중순에는 영화가 보고 싶어서 잠을 못 들기까지 했다. 그새 [Doctor Who] 에피소드는 두어 편 봤는데, 재미있었지만 영화적인 갈증을 해소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더라.  

[수면의 과학]은 아버지가 죽은 후, (이혼했던) 어머니의 부름으로 주인공 스테판이 프랑스에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머니가 소개해 준 달력 회사에 각 달의 세계적 재난을 소재로 한 달력 그림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가 보지만, 실제로 맡은 일은 누드 달력의 (누드 사진 편집도 아니고) 상단에 홍보 로고를 집어 넣는 지겨운 단순작업이다. 중략하고 옆집 스테파니를 좋아하게 되지만 꿈과 현실을 혼동하여 자꾸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 철없는 스테판을 이해하기란 스테파니에게 너무 어렵다.

줄거리보다도,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스테판의 몽상을 영상화한 장면들 자체가 즐거웠다. 휴지 속통으로 만들어진 기차와 골판지 차, 셀로판이 펄럭거리는 바다, 가벼운 솜 구름과 폭신폭신한 타이프라이터며 전화기 등 상품화된다면 사고 싶은(...) 아이템이 많았다. 스테판은 굉장히 유치하고 철없는, 겉만 어른이지 속은 딱 열네 살 사내아이같은 인물이었다. 짜증스러울 수 있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살려 낸 주연 배우의 역할 해석에 감탄했다. 정말 조금만 어긋났으면 "뭐 저런....." 하면서 영화관을 나섰으리라.

[이터널 선샤인] 보다 '이야기'로서의 밀도나 감성은 많이 떨어지는 영화였다. 그럼에도 웃으면서 재미있게 보았고, 이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은 들지 않지만 공드리 감독의 다음 작품에는 여전히 조금 기대하고 있다.(하지만 다음 작도 이 정도라면 생각을 달리하게 될 듯.) 영화관을 나서고 나서도 한참 몽롱한 기분이었다. 걷다 말고 쎄씨 어쩌고 하는, 벌써 상호를 잊어버린 와플 전문점에 충동적으로 들어간 것도 영화 때문이었다 싶다. 상당히 선곡을 잘 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샛노란 천막에 하늘색 나무문으로 된 곳이었다. 맛과 가격은 (흠잡을 데 없지만 미묘하게 비효율적인 점이) 딱 그 동네 다웠다.

덧: 명함을 가져 왔었군. 와플집 상호는 'Ceci Cela'. 케이크 집 가루(Garu) 근처에 있다.

댓글 1개:

  1. 스테파니 역 배우가 제 취향이라 마음에 들었었죠. 영화도 좀 정신없긴 했지만 재밌게 본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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