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17일 토요일

2007년 3월 17일 토요일 : 빔 밴더스 특별전 - 파리, 텍사스(Paris, Texas) /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

오늘은 스폰지하우스의 [빔 밴더스 특별전] 프로그램으로 그의 84년 작 [파리, 텍사스(Paris, Texas | color | 148)]와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 | 1987 | B&W, color | 128)]를 보는 날이었다.

날씨가 좋기에 홍대 앞 카카오 봄(Cacao Boom)에 가서 비상식량으로 바크초콜릿을 사고 - 3월 말까지 스트로베리 페어를 한다더라. 정말 맛있어 보이는 딸기디핑초콜릿, 산딸기와 블루베리 초콜릿 등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싫어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기사님이 찬양방송을 커다랗게 틀어 놓아서 30분 동안 계속 찬송가를 듣느라 무척 괴로웠다. 중간 중간 DJ의 장중한 코멘트도 있었는데, 내가 내릴 때쯤 "믿음 없는 자와 마지막으로 교제한 것은 언제입니까? (중략) 믿음 없는 자에게 마지막으로 기쁨의 말씀을 전한 것은 언제입니까?" 라는 마지막 인사가 나왔다.

......범인은 너냐! -_-

버스에서 내리니 왠지 허유마냥 어딘가 씻고 싶어졌다. 뎀셀에 들어가 손을 씻고 아이스 셰이킹 에스프레소를 마신 후, 다섯 시가 되기 조금 전에 스폰지하우스로 갔다. 그런데 앞 프로그램인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GV 일정이 지연되어 [파리, 텍사스]의 상영도 덩달아 밀려, 20분이 지나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대신 원래 GV가 없는 [파리, 텍사스] 상영 전에 감독님이 잠시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입장을 하려다 보니 아뿔싸, 감독과의 대화가 있는데 필기구를 전혀 준비하지 않고 덜렁 왔잖아! 잠깐 좌절했으나 아우님에게서 빌린 녹음기능 있는 MP3P가 가방에 들어 있었던 것이 떠올라 다행히 GV를 모두 녹음할 수 있었다.

아, 지금 생각났는데, MP3P가 있었으니 버스에서도 꾸역꾸역 괴로워하지 말고 그냥 [Doctor Who]를 복습했으면 되었네.;

여하튼 그래서 [파리, 텍사스] 상영 전에 잠깐 감독님 말씀을 들었다. 아주 잠깐이라 영화에 대해 들은 다음, 감독님이 질문을 딱 하나만 받겠다고 하셨다.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고 감독님이 한 사람을 지명했는데, 그 사람의 질문이 "독일 사람이시죠?" 였다.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가 상영관을 메웠다. 나는 그나마 [베를린 천사의 시] GV를 기다리고 있었고, 별달리 질문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 괜찮았지만, 마음 속에 꼭 하고 싶은 질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정말 허탈했겠더라. 사실상 무의미한 질문이라 통역인이 알면서 물으셨냐고 확인하자, 독일어로 말하는 것이 들어 보고 싶어서 그랬단다. 그 말을 들으니 저 질문이 처음만큼 황당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77년 이후 30년 만에 한국에 온 좋아하는 감독에게서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Ich heisse Wim Wenders....'를 듣고 돌아간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파리, 텍사스]는 처음 보는 영화였다. 제목과 줄거리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이 여럿 있었고, 영화를 보면서도 초반과 중간 중간에 너무 명백하게 '본 적 있는' 장면이 나와서 헷갈렸으나, 뒤로 가니 첫 관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봤다면 잊었을 리 없는 영화였다. (범인은 EBS의 뉴저먼시네마 프로그램이었던 듯.)

전반적인 상영 지연으로 인해 [파리, 텍사스] 크레딧이 끝나자마자 전력으로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러 들어갔다. 이번 상영은 매진이었단다. 스크린으로는 재작년 유럽영화제 이후 두 번째였다. 몇 번을 봐도 너무나 훌륭하다. 그 공간감과 고양감, '본다'는 행위 자체의 존재감,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는 느낌-볼 때마다 새로이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나는 도입부와 도서관 장면(아찔하다), 콜롬보 형사가 나오는 부분, 인간이 된 천사가 처음 세상을 경험하는 장면, 거의 끝에서 남은 천사가 닉 케이브 공연장의 벽에 기대 서 있을 때의 그림자 움직임을 특히 좋아한다. 이 영화의 시점샷도 특기할 만 한데, 역시나 감독과의 대화에서도 이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감독이 컬러 장면들을 자세히 보면 실수가 있다고 해서 놀랐다. 완벽해 보였는데!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그 이야기 자체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언제이고 어디이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순간부터 뭔가, 내 인생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로드무비'라고들 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늘 담겨 있는 그 느낌이다. (출생, 졸업, 결혼, 부모의 사망 같은) 명백한 분기점에서 시작을 말하기란 쉽다. 허나 이미 계속되어온 날것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살아 있기 때문에 몇 번이고 '시작' 할 수 있는 순간들을 짚어내고, 그 시작이 필요로 하는 끝을 말하는 동시에 삶의 존재감을 고양시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리, 텍사스] 역시 그런 영화였다. 이미 흘러온 삶 한복판에서 말하는 헤어짐과 만남, 끝과 시작의 이야기.

감독은 [파리, 텍사스] 상영 전 짧은 시간에 그 영화가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슬픈 사랑이야기이고 그 영화를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부럽다고도 했다. 스크린에서 제대로 볼 기회를 얻어서 정말 기뻤다.

[베를린 천사의 시] 질문시간에 나왔던 얘기 중에 놀라웠던 점은, 그 영화에 대본(script)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페터 한드케가 참여하기도 했으니, 나는 당연히 철저한 시나리오 작업이 있었을 줄 알았는데, 사실 그냥 아이디어와 찍고 싶은 장소들만 생각한 상태에서 매일 촬영을 하고 그날 밤에 다음 날 무엇을 찍을지 조감독과 상의하며 진행했었단다.

콜롬보 형사도 처음부터 출연이 정해져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저렇게 즉흥적으로 이주일 쯤 잠 못 자며 찍다보니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단다. [베를린 천사의 시] 주인공들은 천사인데, 그렇다 보니 계속 지나치게 진지하기만 해서 - 그게 직업이니까! - 재밌고 생동감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누구나 알아보는 인물을 전직 천사로 등장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누구나 알아볼 만한 사람이라면 운동선수나 정치인 정도가 있을 터인데, '정치인이 전직 천사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테고' 그렇다면, 미국인 영화배우가 가장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터라 하여 여차저차 콜롬보 형사가 나왔다.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ueber Berlin)]이라는 원제가 영어로는 [Wings of Desire]가 된 사연도 재미있었다. 저 제목이 독일어로는 운이 딱 맞는데, 프랑스어나 영어로 직역하면 어감이 엉망진창이었단다. 'The Sky of Berlin'이라고 하면 전쟁 영화나 일기예보 같으니까. 결국 계속 제목을 정하지 못한 채로 홍보를 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기가 와서 프랑스인 제작자가 독촉전화를 했을 때 문득 [Wings of Desire]라는 말이 떠올라 농담으로 얘기했는데, 그만 그렇게 결정되었단다. 우리말 제목인 [베를린 천사의 시]는 일본 개봉시의 제목을 직역한 것이라 한다.

다섯 시간 이상 초콜릿만 몇 조각 먹으면서 영화관에 계속 앉아 있었더니 몹시 피곤했지만(그리고 집에 와서 콘스프 등 잡다한 먹을거리를 대충 먹었더니 일요일 오전에 배가 아파 고생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정말 행복하고 두근두근한 하루였다. [빔 밴더스 특별전]은 종로 3가에서 3월 28일까지 한다.

댓글 4개:

  1. 전에 부산대에 앨리스 워커 왔을 때도, 꼭 '칼라 퍼플'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는 사람 있더군요. 그때 워커 아줌마는 약간 신경질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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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애쉬블레스 - 2007/03/18 18:58
    그건 아무래도 명백한 예습 부족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작품에 대한 질문이긴 했네요. orz

    그래도 빔 밴더스는 "저는 독일인이고 부모님도 독일인이고 심지어 조부모님도 독일인이죠. 그러니 제 안에 한국인은 거의 없는 셈이죠. 여기 와서 먹은 한국 음식들 빼고는요." 하고 재치있게 답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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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올드독의 감독님 관련 이야기가 있더군요. 보셨으려나요?

    http://www.ticketlink.co.kr/ticketlink/WebZine/Index.jsp?LinkFile=/WebZine/Board/View.jsp?SeqNo=7166&brdcode=A02&selected=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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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 저도 '독일사람이시죠?'의 질문의 순간에

    극장 안에 있었습니다;;;

    잊지못할 Gv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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