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26일 일요일

2006년 2월 26일 일요일

점심 즈음 카페 이마(cafe ima)에서 지구정복비밀결사 2006년 신년회를 했다. 고양이님, 동진님, 나 셋이 먼저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후식으로 주문한 아이스크림 와플이 나올 즈음 luke님이 오셨고, 버스를 잘못 타 고생하셨다는 야롤님이 예정 시각을 훨씬 넘겨 도착하셨다. 어제 [아스트랄한 문제가 나오는] 시험을 치신 고양이님 얘기를 듣고 몇 가지 책과 영화도 추천 받았다. 고양이님께서 얼마 전에 유종호 선생님 퇴임 강연 얘길 하셨는데, 오늘 대화 하던 중에야 그 분이 시 관련서도 쓰신 평론가 유종호 님임을 기억해 냈다. 며칠만 더 일찍 생각해 냈더라면 [외부인 참석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살금살금 강연장에 가 봤을 텐데, 줄곧 '어디서 본 이름인데......고양이님에게서 들었던가?'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 책장에서 봤던 거였다니. (- _)

동진님께 빌려 드리려 호에로펜 전권을 가져가서, 셋(나중엔 넷)이서 수다 떨다 만화 보다 했다. 카페 이마는 놀랄 만큼 혼잡했는데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 동진님 말씀에 따르면 청계천이 생긴 다음부터 이리 되었단다.

야롤님이 오신 후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지 방향이 비슷한 나와 고양이님은 함께 신촌/홍대 쪽으로 갔다. 연대 후문(?)으로 처음 들어가 보았는데, 뜻밖에 굉장히 '산'이란 느낌이었다. 지금은 아직 황량해 보였지만, 큰 나무가 많고 곳곳에 풀숲도 있어 봄/여름이 되면 산책에 제격이겠더라.

티타임 즈음에 아란양과 만나 홍대 앞 카페 '인클라우드'에서 치즈케익과 핫케이크를 곁들여 차를 마셨다. 차 한 잔 마시고 헤어질 요량이었으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흥이 나서 '카오산'에 가서 저녁 식사까지 하고,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앉아 있다가 헤어졌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울 만큼 말을 많이 했는데, 시험 이후 줄곧 미묘한 각성 상태였다가 같은 고시생, 그 중에서도 좋아하는 아란양을 만나 비로소 긴장이 풀어진 탓이 아니었나 싶다.

어제까지만 해도 봄이었는데, 오늘은 바람이 몹시 찼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2006년 2월 25일 토요일

2006년 2월 25일 토요일 : 느리게 변하는 나이

겨울 초입부터 가벼운 무력감에 시달려 왔다.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모드 상시 온 상태이던 내가 '이렇게 살다가 죽겠지......그럼 육십 년 뒤든 내일이든 상관 없잖아.' 따위 생각까지 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별일이 나지도 않았는데, 멀쩡하게 일어나서 종일 공부 하고, 밤에 원고 하고, 심지어 기획서까지 쓴 다음 잠자리에 들어 문을 잠그고 훌쩍이기도 했다. 일시적인 우울함을 넘어서는 것일지 모르니 차라리 빨리 상담소를 찾아가 볼까 생각하기 시작할 즈음, 내가 조금 이상해 진 것을 눈치챈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조급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앞으로도 네겐 중요한 변화가 많이 찾아오겠지. 지금까지처럼 보이는 변화가 아닌 것 뿐이야. 이제 느리게 변하는 나이가 된 거야."

지금까지 나는 항상 특별했고 일상은 늘 새로웠다. 환경은 지루할 새 없이 바뀌었고, 성장 과정 하나 하나는 눈에 보이는 변화로 채워져 있었다. 내가 최근 느끼던 따분함은, 이제 '보이는 변화'가 더 이상 자주 찾아오지 않는 시기에 들어서면서 느낀, 말하자면 속도 조절 과정에 따른 위화감이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이상을 가진 어린이는 반짝반짝 빛을 낸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좁은 창 사이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상태'다. 창 안에 서 있는 아이는 좁다랗게 보이는 분명한 이상의 세계를 눈으로 좇을 수 있다. 이미 창 밖에 있는 어른들의 눈에, 좁은 창 사이로 환한 빛을 받고 선 아이는 특별해 보인다. 나이듦은 그 창을 여는 것과 같다. 빛을 받고 있는 사람이 나 하나만이 아님을, 세상은 창 사이로 보이던 길쭉하고 가느다란 풍경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은 평범해진다.

얼마 전부터 나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온 유년기의 고민과 학창 시절의 상처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가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 누구에게도 고민을 터놓지 못할 때의 막막함, 그리고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을 때의 외로움, 순정 만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처럼, 화장실 칸 안에서, 밖에서 나에 대해 말하는 내가 모르는 아이들이 어서 교실에 들어가 주길 바라고 섰을 때의 아찔함,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나는 남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되겠어, 지금 이 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해서, 죽을 각오로 살아서, 나중에 나 같은 사람을 만나면 손을 내밀어 주겠어 - 하고 되뇌고 또 되뇌었던 많은 밤들에 대해 울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말할 수 있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줄곧 가려웠던 딱지가 떨어져 기억을 부르는 희미한 흉터만 남았고, 그 순간 '이제 끝났다. 이제 정말로 괜찮다'는 느낌이 너무나 분명하게 찾아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 나만 몰래 빛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따르는 숨길 수 없는 아쉬움과, 보이지 않는 곳에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갖고 있는 비범함을 알아보기 시작할 때의 짜릿함. 현실적인 고민을 시작한 것이 이상을 상실해서가 아니라 창을 더 넓게 열고 역시 빛을 받고 있는 세상의 나머지 부분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이해.

일상을 놀라게 할 때의 통쾌함은 앞으로 점점 더 느끼기 어려우리라. 이 평범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스물셋, 나는 느리게 변하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다.

2006년 2월 24일 금요일

2006년 2월 24일 금요일

졸업식 날이라 학교에 갔다. 올해 졸업하는 동기들은 물론이고, 아직 학기가 남은 동기/선배들도 여럿 만나 반갑고 즐거웠다. 역시 올해 졸업인 혜수 언니를 못 찾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어제 휴학계 내러 간 길에 우연히 뵙긴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나. 사진을 많이 찍었으나, 내 카메라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몇 장이나 받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다. 동기들의 부모님들도 오셨는데, 경훈 아버님이 경훈이와 정말 닮은 - 정확히 하자면 경훈이가 아버님을 닮은 것이지만 - '로맨스 그레이'셔서, "경훈이도 나이 들면 저렇게 되는 거야?(두근두근)" 하고 감탄했다. 졸업생들, 가족들, 재학생들로 학교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졸업 앨범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 들고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독서실 의자 밑 - 사물함에 안 들어가더라 - 에 살짝 넣어 두고 왔다. 내일 집에 가져와야지.

저녁에는 파이낸스 센터 지하 1층에 있는 지중해 요리 전문점 '라 보테가(La Bottega)' 에서 지구정복비밀결사 2005년 송년회를 했다. 오랜만이라서인지 많이들 오셨다. 참석자는 yarol님, 동진님, as님, 파란날개님, cosmo님, kyoko님(와인협찬), rashper님, 서늘님, 에라오빠와 scifi님, 누리님(와인협찬). 바로 옆 건물에서 근무하는 강명님은 이번에 내신 책만 나눠 주고(고맙습니다) 다시 일 하러; 가셨다.

'라 보테가'에서는 부야베스와 빠에야를 먹었다. 부야베스와 빠에야는 각각 해물탕과 철판 볶음밥 비스무레한 스페인 해물 요리다. 빠에야를 먹으러 가자고 몇 년 동안 야롤님과 말만 하고 있었는데, - 같이 가기로 했던 압구정의 스페니쉬 레스토랑은 그 사이에 문을 닫았다.; - 오늘 마침내 미션 하나 클리어 실제로 먹었다.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맞에 기대 이상으로 잘 맞았다. 초코무스로 식사를 끝낸 다음, 늦게 오신 scifi님과 누리님을 위해 주문한 빠에야를 또 먹었을 정도다.


부야베스

빠에야

티라미수

초코무스

요리 전문가이신 kyoko님 덕분에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어 좋았다. 뒤에 오신 누리님은 소뮬리에시란다. 이 두 분만 오시면 지정사는 천하무적겠소이다.

그동안의 지정사 활동상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피라미드식 활동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지정사 용어집'을 만들자는 얘기도 나왔다. 만들어서 유료 판매하는 건 어떨까나......(망상 돌입)

용어집에 들어갈 단어 중 '제이 모드' 라는 말이 있다. 창안자는 상훈님.
a님: '제이모드'란 말을 듣더니 sh가 밥만 먹고 집에 가는 거 아니냐더군요.
n님: 제이모드면 밥만 먹는 게 아니라 밥하고 디저트까지 먹고 가는 거 아닌가?
y님: 그게 아니라, 짧은 시간에 밥과 술을 와구와구 먹으며 압축적으로 노는 게 제이모드라니까.
j: ...... 제이모드의 권위자로서 단언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아니에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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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때문에 아직 고생 중이신 상준님이 다른 일로 먼저 일어나시고, 나와 종인님, 동진님은 열 시 십 분쯤 나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반가운 얼굴도 많이 본, 행복한 하루였다.

2006년 2월 22일 수요일

2006년 2월 22일 수요일

저녁에 정란과 치뽈리나에서 식사를 했다. 미리 약속을 잡지 않고 당일 오전에야 연락한 터라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밥 잘 먹고 덤으로 제니스 카페테리아에 가서 오랜만에 티라미수도 먹었다.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잠든, 평소보다 1/6쯤 긴 하루였다.

2006년 2월 12일 일요일

2006년 2월 12일 일요일

새미가 서울에 올라왔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만나 토니로마스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카페 이마의 아이스크림 와플을 먹고 싶었으나 저녁 8시에 마감한대서 못 먹었다.) 새미와 서울에서 만난 것은 처음으로, 한산한 서울 시내에 새미가 서 있는 모습은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J: 제대로 살고 싶은데.
S: 우리 제대로 살고 있어.
J: 흐음, 그런가.
S: 제대로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
J: 음, 그건 그래.
S: 뭐, 제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려고 생각은 하고 있-
J: 잠깐, 잠깐, 거기까지. 그렇게나 정확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점점 빨리 갔다. 선물로 엽서 세트를 받았다.

2006년 2월 6일 월요일

2006년 2월 5일 일요일 : 샹탈 아커만 회고전 '나, 너, 그,그녀'

서울 시네마테크에 가서 샹탈 아커만(Chantal Akerman, 1950-)의 1974년 작 '나, 너, 그, 그녀(Je, tu, il, elle)'를 보았다. 아커만이 직접 출연한 초기작으로, 전반 35분 동안은 편지를 쓰면서 설탕을 퍼먹고 후반 20분 동안은 여자친구와 섹스를 하는 내용이었다. 그 사이 50여 분 간에는 트럭을 타고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다.

무척 개인적이고 쓸쓸한 영화였다. 이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04년 작 '이사 소동'도 꼭 보고 싶은데,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 다음 주 일요일 저녁 상영이 있긴 하나.....

영화를 본 후에는 노량진에 가서 정란이와 차를 마셨다. 원래는 간단히 차만 한 잔 하고 귀가할 생각이었으나, 얘기를 하다 보니 헤어지기가 아쉬워져 홍대 앞 치뽈리나로 이동, 저녁도 같이 먹었다. 정란이가 앞으로 마창 쪽에 계속 살 생각이라는 것이 무척 아쉽다. 가까이에 마음 맞는 친구 두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13권을 샀고, 밤에는 오랜만에 아우님 방에서 같이 잤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아침 공부를 하고 내가 일어날 시간이면 요가원으로 사라지는 아우님의 기를 받아 나도 일찍 일어나 볼 요량이었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났다.

서울아트시네마 3월 프로그램은 프랑스 누벨바그 특별전과 키에슬롭스키 10주기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