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적 판단중지 역시 일종의 의식작용인 한에서 우리는 어떤 정립에 대해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수행할 경우 그러한 정립에 대해 모종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 어떤 정립에 대해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수행한다 함은 우리가 그것이 참이라거나 거짓이라거나 의심스럽다거나 그럴듯해 보인다거나 하는 식의 일체의 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그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위미한다. 이 경우 판단중지된 정립작용은 계속하여 그의 대상을 정립하고 있으나 다만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반성적 의식은 저 정립작용을 함께 수행하지 앟고 바로 그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것이다.지난 학기에 이태수 선생님(서양고대철학) 철학이 어째서 난해할 수 밖에 없는가에 관해, 결국 그 난해함과 엄밀함이 철학의 필연적 본질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 적이 있다. 이 책도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날 만큼 쉽게 쓰인 책(!)이다. 아무리 쉽게 풀어 쓰여 있어도 여전히 헷갈리지만, '잘 모르던 것을 정확히 알게 될 때'의 경이감은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다. 지와 무지 사이의 경계는 때로 대단히 선명하게 보이고, 그 선을 발견한 순간에는 '실존적 경험의 주체로서의 몸이' 절로 들썩인다. 세상에 이만큼이나 지속적으로 경이롭고 재미있고 즐겁고 또렷하게 반짝이는 학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특히 훗설의 현상학은, 지금까지 영국경험론(과 그 연장선상에서의 근현대 인식론)을 열렬히 추종했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다.
'저 정립작용이 세계 및 세계내 대상이 어떠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나는 저 정립작용과 거리를 취하면서 그것을 따라 동일한 정립작용을 수행하지 않고 다만 그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판단중지한다.' (...)
이남인 저, [현상학과 해석학]
2. 그렇지만 요즘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스물다섯, 지금까지 나는 참으로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전생에 나라를 151번은 구한 것 같다.) 그러니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거나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을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왔음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어리광쟁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