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15일 월요일

2006년 5월 15일 월요일

왜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보통 그냥요, 라고 한다. 전공을 선택한 이유 중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도 있고, 현실적인 것도 있다. 그러나 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라 한다면 그 질문에는 분명한 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 때문이다. 나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 그 중에서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우주를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중학생 때 였던가, 뭘 하고 싶느냐는 질문에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사람들 안 만나고 공부만 하고 싶어요.'라고 답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난달 25일 오후 6시쯤 경남 창원시 용호동 대한적십자사 경남지사 건물 4층 총무과 「북한동포와 밥 한그릇 나눠먹기운동」 접수처에 30대 초반의 부부가 함께 들어섰다.
이들은 1백만원권 수표 10장이 들어있는 하얀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놓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위는 이랬다. 그날 오전 10시쯤 경남지사 총무과에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성금을 내고 싶다』며 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금액과 신분을 알려주면 감사서한이라도 보내겠다』고 말한 공인배(공인배·37)대리는 『1천만원을 송금하겠다』는 대답에 깜짝 놀랐다. 『신분을 알고 싶다』고 했으나 이 남자는 『마산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데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성금만 보내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적은 돈이 아니어서 은행계좌로 받는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공대리의 말에 이 남자는 『그러면 오후 5시 학교수업이 끝나면 찾아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 익명의 교사가 십 년 전 내 담임선생님이었다. 담당자는 마지막까지 익명을 요구한 선생님 몰래 기자를 불렀고, 실제 성금이 접수된지 한 달 쯤 지나서 선생님의 사진이 지역 신문에 나오고야 말았다. 당시 기자를 피해 여관에서 자기까지 하며 취재를 거부하던 선생님에게 기자가 "이런 기사를 보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일을 할 동기가 생긴다."고 설득했다는데, 선생님은 정말 이런 말에 순수한 선의로 설득될 만한 사람이었다. 지역 신문 기자는 약속을 어기고 선생님의 실명을 실었다. 선생님은 굉장히 당황하셨지만, 그 기자 덕분에 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상당히 바뀌었다.

강원도 출신인 선생님이 마산에서 교편을 잡기까지의 과정은 '극심한 가난과 불우한 환경 극복'이라는 테마로 5부작 인간극장을 거뜬히 만들 만 한 이야기이다. 선생님의 형편은 결코 넉넉치 못했고, 갓 태어난 아이까지 있었다. 천 만원이라는 돈이 있지도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 선생님이 그 처지에 그만큼 저금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깜짝 놀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그 돈을 남을 주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라고 하면 남들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을 꼬박꼬박 냈다. 의무봉사활동을 가서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삶을 보고 오면 충격과 막연한 무력감에 울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그 모든 일을 말하자면 바깥 세상 이야기로, 내가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남의 일로 생각했었다.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고말고. 대단해.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성금을 내는 것도 좋겠지. 지금은 이 용돈으로 사고 싶은 책도 다 못 사는걸. 언젠가 시간이 나면 봉사활동 같은 걸 제대로 해 보는 것도 좋겠지. 지금은 바빠서 어려워.

반 아이가 신문에서 오려온 기사를 보고 나는 말 그대로 '경악'했었다. TV나 연말 신문에 가끔 나오는 '그런' 사람이 내 생활 속에 줄곧 있어 왔다는 깨달음은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허물었다. 그 즈음 나는 질풍노도였다고 할 만한 사춘기의 끄트머리에 서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제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사가 나왔을 때는 마침 부모님이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서울에 올라와 계실 때였다. (나는 부모님이 부재중이시란 사실을 선생님에게 말씀드리지 않았었다. 타인의 일에 도통 관심이 없던 내가 선생님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지금까지도 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전화로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선생님과 대화할 기회가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일은 내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분에 대해 하나의 보기를 제시했다. 마치 안경을 바꾸어 낀 듯, 갑자기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처럼 생활 속에서 지금 당장 무언가를 실천하는 수많은 사람들, 행동이 필요한 사회의 많은 문제들, 내가 갖고 있는 것들 - 사람 한 명 한 명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개인을 둘러싼 사회가 내가 늘 관심을 갖고 있던 '별과 별 사이를 채우는 무엇' 만큼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찾아왔다. 책에서 수없이 읽으며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기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상이 펼쳐졌고, 일단 보기 시작한 이상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종교에 귀의하거나 즉시 진로를 바꾸지는 않았다. 내가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한 것은 이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고, 나는 점점 더 독실한 무신론자가 되고 있다. 갑자기 '원만한' 성격이 되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어려워하고, 평생 공부를 하며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삶이 상류에서 아주 조금만 꺾여도 하류에서는 처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 강과 같은 것이라면, 나는 그 꺾임이 일어났던 자리를 십 년 전 그 때로 정확히 짚을 수 있다.

도저히 전공이 성격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자괴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이도 저도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히거나 내가 받는 것의 백분의 일도 도로 내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자각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돌에 새기듯이 한 글자 한 글자 마음 속으로 읊는다. -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얼마 전에는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여겼던 사람으로부터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한 말을 듣고 무척 마음이 상했었다. 돌이켜 보니 아주 오래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때와 지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에 대해 그토록 잘 아는 사람이 내가 한 일을 잘못 판단한다면 그것은 그의 판단 실수라기보다는 내가 기대/예상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내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할 수 없는 일과 하지 않은 일, 투입과 산출을 정직하게 판단했던가. 똑바로 눈을 뜨고 나와 타인을 보았던가. 자문하다 보니 감정이 풀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우며 결심한 대로 살고 있는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고 있는가.

댓글 4개:

  1. 그렇다면 경제학 쪽으로 심각한 관심을 가져보시기를 권합니다. 행시를 준비하신다는 글을 전에 얼핏 본 듯 한데... 그렇다면 아마도 지금쯤 이준구 미시경제학을 마스터하고 계시겠군요. ^^ (사회복지과에서 경제학쪽을 많이 다루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잠깐 웹서치로 찾아본 커리큘럼에는 그다지 경제학 관련 과목들이 보이지 않네요.)



    말씀하신 제이님 은사님 케이스에 경제학적 사고를 대입해 본다면 이 기부된 천만원이 어떻게 쓰이는 것이 가장 사회적으로 바람직할 것이며 그렇게 하려면 어떤 사회적 기제가 필요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실제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기부된 돈들이 정말로 사회복지를 확충하는 재원으로 쓰이지 못하고 낭비되고 있는 사회적 현실이니까요.



    그리고 경제학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 답지않게 scientific하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과학자의 길과 사회복지쪽 관심분야를 합치시켜 같은 길로 만들어 걸어갈 수 있는 장점이 또한 있을 텝니다.



    다만 이쪽 방면은 문제가 수학적인 스킬이 능한 사람은 현실세계의 모델링이나 해석을 잘 하지 못하며 반대로 사회적인 이슈의 모델링이나 해석을 잘 하는 사람은 수학적 스킬이 떨어져서 실제 쓰임새가 있는 이론을 잘 만들어 내지 못하는 딜레마가 자주 생기는 듯 합니다. 그런 까닭에, 소수의 천재들만이 필요한 전공이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도전해 볼만한 학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제 경우는 학부때 우연찮게 이승훈 교수님의 미시경제학과 경제학 개론을 들으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도 강의를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나이도 지긋하신 분인데 어떻게 전자과 학부를 나와서 경제학 박사를 딴 특이하신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참고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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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회복지학을 경제학과 심리학의 경계학문이라고도 하지요. 사회복지학에서는 경제학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많은 경제학과 전공수업을 전공선택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과내 별도 커리큘럼이 없는 이유일 겁니다.) 경제학을 복수/부전공하거나 경제학과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무척 많아요. 저 처럼 경제학과 교과를 거의 듣지 않은 학생이 오히려 드물 정도이지요.



    저 자신은 전공에 대해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답니다. 굳이 유관학문과 비교하자면 경제학 쪽 경계보다는 심리학이나 사회학 쪽 경계에 가깝달까나요. 말씀하신 진로도 진지하게 검토해 보았으나, 아쉽게도(?) 제 관심과 적성에 맞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조언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승훈 선생님은 요즈음도 미시경제학 강의 하신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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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 그래서 사회복지과에 경제학 교과과정이 보이지 않는 거군요. 심리학이나 사회학쪽 경계에서 접근하신다면 아마도 제이님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rational framework보다는 holistic approach쪽으로 기우는 게 아닌가 싶은데 제가 대강 짚은 게 맞는지는 그다지 자신이 없네요. :)



    제경우는 오히려 경제학쪽 이론에 심리학쪽 연구방법론을 간혹 참조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데... 심리학쪽에서는 이쪽을 또 qualitative 라는 단어로 통칭하는 것 같습니다. 통계 분석과 모델, 통제된 실험 이상이 필요할 때 이쪽 얘기가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승훈 교수님 요즘도 강의하신다는 얘기를 들으니 참 반갑습니다. 학부 마지막 학기 때 우연찮게 이승훈 교수님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제 경우는 그게 제 인생의 항로를 살짝 꺾어주는 이벤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번 언젠가 찾아 뵙고 싶은데 아마 이승훈 교수님은 저를 전혀 모르실 겁니다. :)



    좋은 하루 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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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글쎄요. 경제학자들이 보는 이상적인 사회는 효율성이 극대화되어 있는 곳이죠.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 혹은 약자에 속하는 집단에 대한 배려는 미약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 Ariel Rubinstein이라는 경제학자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현재의 경제학 교육이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물론 아주 수학적인 모델과 서베이이긴 하지만 통계적인 뒷받침을 통해서 말이죠.



    사실 경제학자 중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아우르며 아름다운 세상까지는 아니지만, 살맛나는 세상 정도도 고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Rubinstein같은 사람은 오히려 매우 드문 경우겠지요. 지금 세상이 그나마 이정도의 모양새를 갖추는 것도, 경제학자 혹은 그보다 더 효율성에 목숨을 거는 기업가 덕분이 아니라, Jay님의 은사님이나 혹은 필드에서 묵묵히 뛰고 있는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 덕분이겠지요.



    내 것을 내어놓아 다른 이들과 나눈다는 의미는, 자선의 경제학이니 하면서, 효용 극대화와 효율성 운운하며 접근하기 보다는, 이 사회에서 내가 행해야할 책임, 혹은 윤리적 덕목으로 가르치고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네요.



    사람들마다 중하게 여기는 우선순위가 다르겠지만, 이미 국민소득이 만 불, 이만 불이 넘어간 나라들에서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통해 부를 늘리는 것보다, 지금도 수 만 명씩 굶어죽는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어려움을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싶네요. 뭐,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낼 모레 경제학 Ph.D.받을 사람이, 십 년 쯤 뒤에는 꼭 와이프랑 아프리카에서 일하길 꿈꾸며 적은 자기 반성입니다.



    초면에 인사도 없이 긴 잡설을 남겨 죄송하구요, 주인장께서도 하시는 일, 뜻하는 바 모두 이루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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