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0일 수요일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배명훈님, 이명현 박사님과 만났다. 한시 반 약속이라 수업 끝나고 바로 갔는데, 점심을 들지 않은 사람이 나 뿐이었다. 이명현 박사님은 조경철 박사님의 장지에 갔다가 검은 리본을 단 채 바로 오셨다. 파주 쪽인가? 이북이 보이는 곳이 장지였다고 한다. 조경철 박사님이 이북 출신인 줄 이제 알았다. 그 묘지에는 평안도, 함경도 등 도별로 장지가 마련되어 있고 북녘이 보이게 묘를 만들어 장사를 지낸다고 한다. 장지는 북에도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산이 보이는 자리였단다.

두 분과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다. 꽤 신도 나서, 역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지난 2주 동안 병이 나도록 고민했던 UW 건에는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후의 국제법 시간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만든 (국내 미방영) 북한 주민 취재 프로그램을 10분 정도 보았다. 위대하신 장군님과 수령님을 찬양하며 만세를 부르고 부르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 헛 하고 웃었다. 황당해서였겠지만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내 눈에는 다른 자리에서 보았던 개신교회의 찬양(?) 장면과 똑같았다. 북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뭄, 홍수, 빈곤, 죽음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생존이 워낙 절박하니 독재는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처럼 느껴질 정도다. 북한의 붕괴가 두렵다. "북한이 몇 년 안에 붕괴할텐데, 그러면 땅 찾는 부동산 소송부터 해서 얼마나 일이 많아지겠냐. 여러분에게는 블루오션이 기다리고 있으니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농담이라도 듣기 괴로운 말을 하는 교수님(국제법 아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변호사를 하겠다고 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년 전 일이니 이제 열린 자리에 써도 될 것 같은데, 2006년에 나는 모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하며 새터민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다. 차상위 계층 가정을 방문조사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상황인지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새터민 가정인줄 모르고 갔다가 실수를 저질러서 이후 몇 년 동안 반성하고 반성했으나 그 일은 아직 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생략하고, 어쨌든 그때 눈앞에 앉은 만삭의 아주머니가 "지가 두만강을 건널 적에......"라고 자연스럽게 말했을 때의 당혹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체험을 압도하는 타인의 경험이 어디 그것뿐이랴.

병원에서 항생제를 과다처방해줬으나 (약국에서 병원에 정말 이렇게 주냐고 확인전화를 했을 정도였다) 나 역시 당장 낫는 것이 급한 처지라 준 대로 먹었더니 이두의 염증은 한결 가라앉았다. 그런데 빨리 나아 보겠다고 따뜻한 물을 하도 많이 마셔서 배탈이 났다. 그래서 이 시각까지 못 자고 있다(지금 새벽 2:40). 베를린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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