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1일 목요일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공강 시간에 보라님과 만났다. 이대 후문 쪽으로 갔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 정장구두를 신은 보라님이 한참을 둘러 가느라 고생하셨다. 바로 어제 왕복했던 길이라 자신이 있었는데 우쭐했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20세기에 학교를 떠나 21세기에 돌아온 보라님의 인도를 받아 간신히 LORD Sandwich라는 맛있는 샌드위치/피자 카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거의 백인들만 전공하는 폴란드, 러시아 문학을 오랫동안 해외에서 공부하신 보라님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미국에서 조교 시절을 포함해 10년 동안 강의를 했는데, 그 10년 내내 유색인종인 학생이 단 두 명 밖에 없었단다. 그나마도 한 명은 도중에 그만두어서, 결국 한 수업을 끝까지 함께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요전에 보미가 집에 놀러 왔을 때, 맡고 있는 학부생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과(사회복지)는 흑인이나 아시아계가 많다고 했던 것과 비교되었다. 또 폴란드에 있을 때는 10개월 동안 수도 없이 전차를 탔는데 언제나 전차에 동양인이 보라님 한 명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같은 칸에 베트남 아주머니가 탄 것을 처음으로 보았는데, 그 때, 나는 일단 유학중이고 돌아갈 집이 있지만 저 분은 평생 이렇게 이방인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단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폴란드에는 베트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 길고 오랜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이란 어떤 것일까?

그 외에도 - 여기에서 전공 관련 서적을 구입하기가 너무 힘들어 책을 사러 블라디보스토크에 갈까 생각중인데,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배로 9시간이 걸리고 비용은 1등석은 80만원 정도, 2등석은 4,50만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예상보다 시간이 적게 걸리고 비용도 저렴해서 놀랐다. 다만 러시아는 봄에 대체로 치안이 좋지 않은데, 4월 20일 히틀러 생일 때문이란다. 스킨헤드의 경우 외국인 혐오 범죄를 저지르기는 해도 나름대로 내부 규율 같은 것이 있어서 그 행동 패턴을 알면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하지만(예를 들어 모이는 장소가 있고, 여자보다 남자 유색인종을 공격한다고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훌리건들의 범죄는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다고 한다. 또 폴란드는 남한보다 북한과 오랫동안 친밀하게 수교해 왔기 때문에, 양측 대사관이 모두 있는 바르샤바에서는 괜찮지만 보라님이 계셨던 도시처럼 북한은 대사관이 있고 남한은 문화관(?) 같은 것만 있는 곳에서 교통사고가 나거나 하면, 남한 사람의 신병을 북한 대사관으로 잘못 인도하는 경우가 생긴다. 여권을 갖고 있어도 영문 국명까지 비슷하기 때문에 의식이 있어서 남쪽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경우 실종되기도 한다니 (북측에서는 일단 남한 사람이 손에 들어오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려고 한단다) 무서운 현실이다. SF 팬으로 유명한 주한체코대사님의 이야기에는 구체제에 대한 보헤미안적 로망이 듬뿍 담겨 있어서, 다음에 꼭 대사님을 직접 만나서 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출판사나 편집자, 이주, 수업 등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세 시 반 쯤 헤어졌다. 나는 국제법과 국제인권법 수업을 듣고 집에 왔다. 보라님 덕분에 알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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