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10일 금요일

2007년 8월 9일 목요일

어제 밤에는 방에 있는 텔레비전을 켜서 보았는데, 'Ein Job, deine Chance'라는 프로그램을 하더라.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직업의 훈련을 받을 기회를 주고, 그 결과를 평가해 취직시켜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독일에서 최근 급성장한 저가 항공사인 에어 베를린(Air Berlin)의 스튜어드/스튜어디스를 지망하는 사람 셋이 나와서 음료 제공, 기내 문제상황 대처, 긴급시 수영, 영어 시험, 화재 진압 등의 훈련을 받았다. 스물 한 살인 화장품 가게 점원(여), 스물 여섯인 치과 보조원(여), 서른 여덟인 호텔 매니저(남) 세 사람이었는데, 마지막에 취직시켜 줄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앞 아가씨 둘이 합격하자 한 명은 떨어지리라고 생각했는지 호텔 매니저 청년이 바짝 긴장했으나 모두 합격했다. CSI나 Without A Trace의 광고도 나왔는데, 모두 더빙이더라. 사우스파크도 했다. 패션이나 스포츠, 자동차 관련 잡지 광고가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는 것이 특이했다.

오늘은 여덟 시 조금 전에 일어났다. 아침으로는 베이컨, 에그스크램블, 토스트, 체리토마토, 우유를 준비해 먹었다. 콧물이 너무 심하게 나서 한국에서 준비해 간 비염 약을 먹었다. 학원에 가려고 준비를 다 했다가, 아무래도 오늘 할 일을 생각하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나가면서 방향을 바꿔 알렉산더 광장으로 갔다. 즉, 땡땡이다. 알렉산더 광장 역사 내에 있는 라이제젠트룸에 가서 저먼 레일 패스를 갖고 있는 외국인인데, 토요일에 베를린 중앙역에서 프라하로 가는 표를 사려고 한다고 했다. 마음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보고 갔지만 대화란 상호작용인지라 중간에 한 번 위기가 왔다. 그래서 '슈프레헨 지 엥글리쉬?(영어 하시나요?)' 하자 즉시 '니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통일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구 동베를린 지역과 서베를린 지역의 차이는 적지 않다. 영어 실력은 확실히 차이가 나서, 알렉산더 광장의 라이제젠트룸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자 아, 여기는 구 동베를린이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중앙역이나 동물원 역의 라이제젠트룸에서는 영어가 완전히 통했었다. 그리고 갓 왔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생활 공간 자체의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독일어에는 키츠(Kiez)라는 말이 있는데, 작고 폐쇄적인 지역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베를린은 국제적인 도시이지만, 평생 자신의 키츠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만 생활하면서 키츠 외부인들에게는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내가 지금 머무르는 곳은 프렌쯔라우어 베르크(Prenzlauer Berg)의 구 동베를린 지역이다.

어쨌든 독일어로 해결했다. 저먼레일패스는 독일 국경 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추가로 구입해야 했던 체코 내 왕복 표도 제대로 사고, 원하는 시간대의 열차 시간표도 받고, 24살인데 유스 할인이 될지 물어보아 확인도 했다(안 된단다). 처음에는 프라하 중앙역이 아니라 다른 역으로 가는 직행 시간표를 출력해 주시기에, 그 역이 아니라 다른 역이라고 해서 맞는 시간표를 받았다.

독일어로 대화하는 요령을 좀 알 것 같다. 한국어나 영어로 소통할 때처럼 빨리 해결하려는 마음을 앞세워 자꾸 다짜고짜 영어로 넘어가거나 먼저 답답해 하면 안 된다. 일단 웃는 얼굴로 타이밍에 맞춰 인사를 한 다음 -여기서는 슈퍼 계산대에 설 때는 물론이고, 그냥 가게에 들어설 때도 주인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한다.- 천천히 성의 있게 말을 하면 충분히 기분 좋게 뜻을 통할 수 있다. 어차피 외모를 보면 외국인인 게 단번에 표시가 나니까 상대편도 내 말에 주의를 기울여 준다. 라이제젠트룸에서 영어를 전혀 하지 않고 표를 사고 기분 좋게 당케 쇤-하고 나와서 무척 뿌듯했다.

그리고 쿠담에 가서 벼르고 있던 짧은 청바지와 샌들을 샀다. 이제 굉장히 더운데, 샌들이 없으니 더 더웠다. 운동화 한 켤레만 갖고 간 런던에서 공동 샤워장에서 나올 때마다 쩔쩔 맸던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런던과 베를린에서 온갖 샌들을 다 봤기 때문에 고르기가 더 힘들었다. 한 가지 주제만 갖고 많은 물건을 보면 비싸고 좋은 것과 싼 물건의 차이가 점점 명확히 보인다. 정말 탐이 나는 편하고 예쁜 신발이 두엇 더 있었지만, 결국 무난하게 한국에 돌아가서도 신을 만 한 할인 품목으로 선택했다. 엄청 고민해서 골랐는데, 고른 신발을 카운터에 들고 가니 하필 내가 고른 신발만 맞는 사이즈가 다 팔리고 없다. 직원이 기다리라고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더니 전시되어 있던 것의 나머지 한 쪽을 찾아서(한 쪽 신발만 전시해 놓고 카운터에서 풀셋을 찾아 주는 시스템이다) 이거라도 괜찮겠느냐며 준다. 도저히 더 고를 힘이 남이 있지 않았고 전시품이라도 깨끗해 보여서 그냥 알겠다고 하고 가지고 나와서 갈아 신었다. 샌들을 신어 보기 위해 한국에서 콘서트 용으로 가져온 구두를 신고 나갔다 보니 발이 아파서 힘들었다. 벌써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굽 없는 샌들을 신으니 천국이로세.

참, 샌들 사려고 구두 가게를 돌아보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독일어로 베를린 사람이냐고 묻는다. 길을 물어보려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지리를 잘 모르니 그냥 아니라고 했는데, 현지인으로 위장하려고 꾸준히 노력한 성과를 마침내 얻은 듯 뿌듯했다. 처음 왔을 때는 내가 생각해도 이방인 티가 너무 역력해서 엄청 튀었고 중간에는 새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혼여행 온 새신부(orz)' 같았다. 그제는 마리나가 내게 원피스 예쁘다며 어디서 샀나고 물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옷이었는데, 옷을 겹쳐 입는 방식을 조금 바꾸어 봤었다. 조금이라도 덜 도드라지려고 (특히 지갑을 도난당한 다음부터는 이 필요를 더욱 절실히 느꼈다) 내 나이 또래 아가씨들의 옷이나 화장, 장신구를 얼마나 열심히 관찰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하철 역 근처의 슈퍼에 가서 청포도와 콘아이스크림을 샀다. 콘아이스크림의 윗부분이 모두 물렁해서 찌그러진 줄 알았는데, 뜯어 보니 크림을 짜 놓은 형태가 그대로 들어 있는 예쁜 아이스크림이었다. 하지만 계산서를 보니 길가의 아이스카페(Eiscafe)에서 파는 콘 아이스크림보다 비싸다. 더 쌀 줄 알고 슈퍼에서 샀는데. 더워서 지하철을 타기도 전에 다 먹었다. 알렉산더 광장까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서, 트램 M2번으로 갈아 탔다. 2호선으로도 집에 갈 수 있지만 지하철 역이 멀어서 트램을 타는 편이 편하다. 알렉산더 광장 지하철 역사에 있는 빵집에서 점심과 저녁으로 먹으려고 애플파이를 두 개 샀다. 여기에는 빵집이 정말 많지만 이상하게 애플파이는 없는 곳도 있어서, 보일 때 사서 들어가려는 생각이었다. 봉지 값은 우리나라처럼 받는 것이 원칙인데,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작은 동네 슈퍼나 빵집에서는 받지 않기도 한다. 체인점에서는 확실히 받는다. 잠깐만요,하고 처리할 기회를 노려 주머니에 모두 담아 왔던 1,2,5 센트 짜리를 우루루 내고 어머나, 하는 빵집 아주머니에게 웃으면서 아마 맞을 거예요- 했다. 그런데 1센트 더 냈다고 돌려받았다.

집에 들어오니 두 시 반 즈음. 정말 더웠다. 텔레비전을 보면 밖에서 땀을 흘리고 온 주인공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를 꺼내서 들이킨 다음 시원하게 캬-한다. 이왕 맥주를 사 놨으니 나도 한 번 그렇게 해 봐야지 결심하고 갓 사온 포도를 씻어 보울에 담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땄다. 포도를 보울에 담은 이유는 어제 본 프로그램에서 중간평가를 통과한 지원자 세 명이 술을 한 잔 마시면서 과일을 보울에 담아 놓고 안주 삼아 먹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텔레비전이 애들 망친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다.

하지만 맛이 없었다. 무알콜일 뿐이지 맥주니까 맥주 맛이 난다면 쓴 것이 당연한데, 써서 실망했다. 포도와 먹어도 애플파이와 먹어도 썼다. 나중에는 민트초컬릿과 함께 먹어서 두 잔을 마셨다. 아까워서 혹시 보관이 될까 하고 뚜껑을 다시 잘 여며 딱 소리나게 꽂은 다음 책상 구석에 눕혀 놓아 보았는데 조금 지나니 맥주가 새어 나오더라. 낙심해서 병을 도로 세워 열고 반 잔 더 마셨다.   

이른 저녁으로는 어제 산 냉동 버터야채를 물에 끓여 익히고 토스트를 구워 우유와 함께 먹었다. 냉동 야채는 브로콜리, 콩, 당근 등이었는데, 역시 냉동했다가 끓여 먹는 거라서 썩 맛은 없었다. 어차피 불을 써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재료를 사서 직접 씻어서 데치면 훨씬 맛있겠지. 하지만 그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만들어진 식품이니까.  

먹고 나서는 머리가 아파서 한 숨 잤다. 일어났는데 덥고 여전히 쿡쿡 찌르는 듯한 두통이 있다. 설마 무알콜 맥주의 후유증인가? 

댓글 1개:

  1. 우와. 잔돈을 세어보고 돌려주다니 역시 독일!(...)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