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1일 수요일

2007년 7월 30일 월요일

어학원 개강일이었다. 수업 시작 시간은 9시 30분. 9시 20분쯤 어학원에 도착해 번호표를 받았다. 인터넷으로 반편성 시험을 보았었지만 일고여덟명으로 나누어서 다시 시험을 본단다. 인터넷 평가는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 어려워 신경이 쓰였는데, 다시 평가를 한다니 수준에 맞는 반에 편성 받을 수 있껬다 싶었다.

아홉 시 사십 분 정도부터 주관식 쓰기 시험을 한 시간 정도 보고, 답안을 낸 다음에는 30분 정도 쉰 다음 인터뷰 시험을 보았는데 준비 땅, 하지 않고 갑자기 질문을 시작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10여 명이나 있는데 -주관식 시험 치고 나서 지각생들이 들어왔다-  왜 내가 첫 번째? 예뻐서? (아마 정답은 '원형 탁자에서 선생님 정면 자리에 앉았기 때문'인 듯)

자유 질답을 한 다음에 칠판에 걸린 사진을 보고 5분 정도 생각한 다음 그 사진의 내용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 네 장 중에 하나를 고르는 방식이었는데 같은 사진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하고 모두들 그 생각을 독일어로 잘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해 했다. 사진 설명만 들어도 그 사람의 성격과 관심사를 알 수 있는 점이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고른 사진은 젊은 남자가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사진을 들어 보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남자가 젊고, 첫 번째 전시회를 앞두고 전시할 사진을 고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 이전에 에이전트가 오늘까지 사진을 골라야 한다고 압박전화를 했고, 지금 그 남자는 '이 사진이 최고야!'라고 막 결정해서 이제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하려는 참이라고 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 온 배우 지망생 아가씨(초초초미인!)는 남자가 실력있는 영화감독으로, 새로 찍는 대규모 영화의 캐스팅을 위해 배우들의 사진을 놓고 고민하고 있으며, 그 장면 이전에는 인터뷰를 했다고 말했다. 역시 스페인에서 온 (사실 대부분 스페인 사람이다) 철학전공자 아마추어 작가 청년도 같은 사진을 골랐는데, 그는 사진 속 남자가 작가로 글이 잘 안 풀려서 쓰다 말고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고 나중에는 계속 술을 마시다가 죽었단다.--; 내 옆에 앉았던 프랑스에서 공부하다 온 아가씨(스페인인)는 남자의 아내가 부부싸움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버러서; 남자가 가족사진을 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후회했는데, 나중에 아내가 돌아온다는 러브스토리를 이야기했다.

편성 시험이 끝나니 12시였다. 또 잠시 쉬었다가 생활 정보와 이번 주 쿨투어 프로그람을 안내받고 1시부터 점심을 먹었다. 학원 근처에 있는 작은 갤러리를 빌려 부페를 차려 놓았더라. 우르르 몰려가서 식사를 했다. 여름 어학 프로그램 참여학생들이 모두 다 있는 자리였는데, 한국인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한국인이 없는 어학원을 찾은 보람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스페인 사람이 많을 줄은 예상치 못해서 난처하기도 했다. 다들 스페인어를 쓴다. 아시아 인은 다 합해서 다섯 명 정도? 그 중 둘은 나와 함께 반편성 시험을 본 타이완 의대생 동기(커플로 추정)로 올해 예과를 끝냈다고 한다. 지난 주에 와서 쾰른과 본, 하노버, 함부르크를 여행한 다음 어제 베를린에 들어왔는데, 집에서 인터넷이 안 되어서 중앙역에서 두 시간이나 걸려 무선랜을 연결해 쓰느라 고생했단다. 우리 집에서는 느리지만 인터넷이 된다고 했더니 몹시 부러워했다. 3주간 코스를 밟고 다시 독일을 일주일 여행한단다. 참,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북한인지 남한인지 다들 물어 보는 것이 신기했다.

새미가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같이 옷을 사러 가기로 했기 떄문에, 식사 다음에 함께 학원 주위를 걸어다녀 보는 프로그램에는 참여하지 않고 중간에 서둘러 나왔다. 너무 추워서 옷 살 일이 급했다. 기온이 계속 최고 15도를 넘지 않는데다 바람이 세게 불고 드문드문 비도 와서, 반편성 시험을 보면서도 추워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엉덩이를 덮을 정도 길이의 점퍼나 초겨울에 어울릴 법한 니트를 입고 다닌다. 여기 기준으로도 이상저온 상태라고 한다.

2:00 새미와 동물원 역에서 만나 쿠담에 갔다. 몇 군데 옷 가게를 돌아보다가 싸고 무난한 디자인이 많은 H&M에 들어갔다. 이 곳에서 마음에 드는 후드를 발견했는데, 사이즈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워서 새미와 번갈아 가며 입어보았다. 그러다가......지갑을 도난당했다.-_- 크로스백에 지갑을 넣어 매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한 사람이 옷을 입어 볼 동안 다른 사람은 두 사람의 크로스백을 받아 매고 있는 식으로 움직였는데, 옷을 입고 거울 앞에 갔다가 돌아온 새미에게 가방을 건네면서 보니까 내 가방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러니까 채 1분도 되지 않는 사이였던 것이다. 내가 새미에게 '이거 원래 열려 있었어?'라고 말하는 순간 둘다 핏기가 가셨다. 원래 열려 있었을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하며 가방에 든 물건을 모두 꺼내 보았으나 지갑만 쏙 없다. 게다가 이게 바로 가는 날이 장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동네 무인 센터로 보내 준 배낭을 찾으려면 현금 카드가 필요하다고 해서 현금 카드 두 장에 비자카드까지 들고 나왔던 참이었다. 무인 센터까지 갔다가 카드가 안 먹히면 곤란하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모두 두 장씩 만들었으면서 같은 지갑 안에 넣어놓다니 지금 생각하면 허술했다. 어학원비 잔금도 들어 있었다. 이것도 원래 어학원에서 나오면서 내려고 하다가, 옷 사러 가니까  현금이 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집에 들르지 않고 그 돈을 그대로 갖고 시내로 나온 것이다. 바로 직원에게 도난당했다고 얘기했다. 직원이 신고를 하고 오더니 경찰이 거기까지 오지는 않으니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라고 한다.

정말 땡전 한 푼 없는 대위기였다. 혼자였다면 경찰서에서 차비를 빌려 집에 돌아가, 서울로 연락해서 '아빠가 보내준 돈으로 여름캠프에 간 지영이'처럼 웨스턴유니언을 이용해야 할 처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새미가 자기 영국은행 현금 카드 두 장으로 일일 최대 출금 한도에 육박하는 돈을 빼서 빌려 주었다. 물가 비싼 런던에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생활하는 유학생의 사정이 정말 빤한데, 그래도 옆에 있으니 도와 줄 수 있어서 다행이란다. 이 은혜를 어찌 갚으리오.

그리고 물어물어 30분 정도 걸어 가장 가까운--; 경찰서에 갔다. 영어를 할 줄 아는 경찰관을 통해 신고서를 작성하고, 지하철을 타고 동물원 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도 봉사활동 할 때 밖에 안 가본 경찰서에 독일에서 이런 일로 가게 되다니! 새미가 부르스트와 감자튀김을 사 주어서 같이 앉아서 먹었다. "너 경찰서에서 정말 너무 순진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더라. 그래서 내가 (괜히 걱정돼서) 자꾸 중간에 말 했잖아."라는 새미 말에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사실 경찰서에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 네가 내가 30일에 출국한다고 했잖아? 그 때 29일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세상에, 영어로 29일이 뭔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30일이라고 했을때 움찔 했구나." "엉.--;" (영어로 29일이 생각 안 났지만 다행히 3초 정도 후에 독일어로 29가 생각났었다.)
참, 신고접수를 끝내고 일어서는데 영어를 하는 경찰관이 난데없이 해브 어 나이스 데이! 라고 인사를 해서 새미와 내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안 어울리잖아!

새미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집에 들어왔다. 집에 와서 우선 신용카드 분실신고를 했다. 외환카드 신고시에는 전화 상태가 안 좋아서 신고번호는 받았는데 사용 내역까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이러고 나니 이미 밤 9시가 지났다. 여권과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만도 천만 다행이다. 현금은 속이 쓰리지만(그게 원고지로 하면 몇 매야!) 여권 분실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몸 안 다쳤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새미 말처럼 처음부터 노리고 있다가 가져간 것 같다. 여기에서 동양인(특히 여행객)은 굉장히 도드라지는데다, 계속 가방을 보고 있었는데 잠깐 안 본 사이에 지갑만 빼가는 일이 우발적인 범행일 리가 없다. 아우.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보내 준 배낭도 못 찾았다.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독일어와 손짓으로)에체 카르테가 없어서 소포를 찾아 올 수 없으니 도와 달라고 했는데, 흔쾌히 내일 아침이라도 괜찮다면 장 보러 가는 길에 가져다 주겠다고 해 주셔서 정말 고마웠다. 좋은 분을 만나서 다행이다. 내가 독일어를 좀 잘 하면 훨씬 친해질 수 있을 텐데;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고 나니 대충 아홉 시 반. 내일부터 정식 어학원 수업이 시작하니까 독일어 공부도 해야지. 영독 사전을 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독일어로 써 본 다음, 내일 어학원에서 써먹으려고 외우고 잤다.

오늘의 지출
1회 승차권 2,10x 2= 4,20
베를린AB구간 1개월 승차권 70,00
식사 약 6,00

댓글 3개:

  1. 액땜... 했다고 치기엔 너무 타격이 큰걸까요. 아무튼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몸 안 다쳐서 다행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파리에서 아직까지도 도난인지 분실인지조차 모를 일도 겪었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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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이쿠. 초반부터 이런저런 일이 많네요... 그래도 친구분이 같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힘내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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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 가슴이 다 철렁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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