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1일 화요일

2007년 8월 20일 월요일

보통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철학과 학생이라고 대답한다. 이곳에서처럼 내 신분이 일단 어학원생이고 주위 사람들도 대부분 자국의 대학생이나 갓 대학을 졸업한 유학희망자인 경우 일단 학생이라는 답만큼 무난한 것도 없다. 유럽에는 사회복지가 학부전공이 아닌 나라가 많기 때문에(사회학의 분과학문이라고 들었다) 사회복지학과라고 말했다가는 구텐탁 프로이트 미히 다음 단계부터 왠지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듯한 기분이 되겠다 싶어서다.

우리 반의 스페인 남학생 루이스는 몇 번을 들어도 외워지지 않는 뭔가 독특한 학문을 전공하고 있는데 -산림학 비슷한 것인 듯- 공부 얘기가 나올 때 마다 아무도 루이스가 산에서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난감한 분위기가 된다. 만국공통 기초학문의 최절정 철학을 복수전공해서 참 다행이다.

어쨌든 실제로 어학원에는 철학 전공자가 많은데, 독일철학의 위상과 타 유럽도시(특히 영국 런던)에 비해 저렴한 학비와 생활비를 생각하면 자연스런 일이다. 한국인이 없는 어학원이라서인지 뜻밖에 음악 전공자는 지금껏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이십 분 정도만 가면 훔볼트 대학이 있다.  훔볼트 대학은 우리로 치자면 신촌에 있는 연대처럼 시내 한가운데에 있지만 왼쪽으로는 미술관 섬(뮤젠 인젤)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국회의사당 끝자락과 브란덴부르크 토어가 보인다.

내가 여기 오고 이 주 쯤 지났을 때였나, 메신저로 대화하던 중에 동생이 "거기서 공부하고 싶어?"라고 물었다. 나는 이곳의 대학 생활에 관해 잘 알지 못하므로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곳에서 살고 싶다고는 생각한다. 석박사 과정은 영어로 코스를 밟을 수도 있고, 그래서 실제로 한국인들이 독일에서 영어 논문으로 석박사를 받기도 한다고 들었다.

독일어로 읽기는 말하기보다 훨씬 쉽고, 쓰기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말을 할 때 제일 곤란한 부분이 독일어와 영어의 어순 차이와 문화 차이로 인한 타이밍의 문제인데, 타이밍은 훈련과 학습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고, 어순 쪽은 읽거나 쓸 때는 (1)작자가 원래 맞게 쓴 글을 바로 읽거나 (2)쓰면서 생각을 정리해 어순을 맞출 수 있으니 괜찮다. 지나치게 성급한 자만인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일 년 정도 어학과정을 제대로 밟고 나면 영어 문헌을 보조삼아 독일어로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훔볼트 대학 앞을 종종 지나며 내가 느끼는 동경은, 학교 중앙도서관의 서고에서 1930년대의 사이언스 지 원본을 펼쳐 볼 때 느끼는 감정과 매우 비슷하다. '지식'이나 '시간', '통찰' 같은 추상적인 관념들이 실질적인 형태를 띠고 오감에 닿을 때면 황홀해진다. 그 형태가 꼭 거대하고 유서 깊은 독일 대학 건물일 필요는 없어서, 사실 나는 신림 2동에서 맨큐의 거시경제학 제 3판을 보다가도 황홀해 하곤 했다. (시험장에서 제2차 시험지를 보면서는 아무래도 황홀해지지 않는 것이 내 고시 공부 과정의 어려움이다) 그제는 포츠담 광장에 있는 쇼핑 센터 아르카덴(Arkaden)에 놀러 갔다가 2층 서점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했다.

책을 많이 사 가고 싶은데 책은 무거워서 살 마음먹기가 어렵다. 책 가격은 우리나라에 비해 비싸지 않다. 특히 두툼한 사진집이나 화보집을 할인해서 8-9유로 정도에 살 수 있는 코너가 있었다. 세계 지도나 이집트 문명 사진집처럼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몇 킬로그램 짜리 책들에 절로 눈이 갔다. 커다란 여행 가방과 그 안에 딱 맞게 들어가는 괴테 전집도 있었다.

SF와 판타지 코너도 물론 꼼꼼히 살펴 보았다. 필립 케이 딕 전집이 예뻤다. 밝은 노랑, 분홍, 연두 등 색으로 각권을 입혀 전집 형태로 나와 있던데  딕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도 탐이 나더라. SF와 판타지는 청소년 서적 코너에도 굉장히 많고, 자국 작가들의 작품도 창소년 서적 쪽에 더 많았다. 이곳은 미하엘 엔데의 나라이기도 하다.

독일 청소년 도서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소개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좋은 책을 단번에 발견해 낼 정도로 독일어를 잘 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문자메세지와 사랑의 스트레스]라는 책은 재미있을까나.; 우리나라와 가격이 비슷하니, 좋은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단 턱 하고 살 만큼 싸지는 않다. 그래서 요즈음은 길 가다가 서점에서 벌려 놓은 할인 매대(대체로 재고품이나 헌 책으로, 영어/독일어/기타언어 책이 섞여 있는 경우도 적잖음)를 보면 꼭 멈춰 서서 뒤져 본다.

오늘의 일과도 간단히 쓰자면 - 아침에는 빵집 캄프에서 밀히카페와 '네모'라는 맛있어 보이는 설탕+사탕가루를 입힌 돌고래 모양 쿠키(신제품), 아몬드를 입히고 초컬릿 소스로 장식한 빵을 사서 학원에 갔다. 다들 제 시간에 안 오는 것 같아서 9시 27분에 교실에 들어갔는데 역시나 내가 제일 먼저 왔더라. 교실 발코니에 있는 탁자에 앉아서 아침 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셨다. 선생님이 35분쯤 들어오셨고, 다음으로 성실한 마리나와 바바라가 왔다.

밀린 일기를 조만간에 쓰지 않을지도 모르니 더 늦기 전에 여기 써 놓자면, 바바라는 지난 주부터 합류한 이탈리아 직장인으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극본이나 극작가에 관심이 많고 지금은 휴가를 내어 온 참이라 다음 주에 돌아가지만, 앞으로 독일 영화 산업에 뛰어들고 싶어한다. 나이는 꽤 많은 편인 것 같은데, 성실하고 독일어도 꽤 잘 한다. 예전에도 독일에 몇 번 왔었고 런던에서도 일 년 살았단다. 회화는 고만고만하지만 듣기를 잘 하고 말을 받는 타이밍이 좋아 역시 벤치마킹 대상이다. 비슷한 수준의 독일어라도 세실리아가 어린 학생 답게 통통 튄다면, 바바라는 정중하고 신중하게 말하는 느낌을 준다. 한 등급 높은 반으로 갔어도 괜찮았을 듯 한데. 여름과정 중간에 들어오다 보니 우리 반으로 온 것 같다.

수업 시간에 세실리아에게 선생님이 '소연이 무엇을 잊어버렸니?"라고 물었다. 문장 만들기 놀이 중이었다. 그러자 세실리아가 고민하다가 'Sie vergisst morgens 'Guten Tag' zu sagen(She forgot to say good afternoon in the morning)'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씩 웃으면서 즉시 'Aber morgens muss man 'Guten Morgen' sagen!(but in the morning, you should say good morning!)' 이라고 농담을 했는데, 상당히 훌륭한 리액션이었다. (스스로 만족)

학원 수업을 마치고는 곧장 카이저에 가서 장을 봤다. 또 먹을 게 없어서; 다시 나오기 귀찮을 것 같아 어제 밤에 장바구니아 장 볼 목록을 미리 가방에 넣어 놨었다. 과일, 채소샐러드, 빵, 우유, 물을 사고, 고민하다가 연어와 새우 팩초밥도 샀다. 내가 좋이하는 새우라서.......집에 와서 점심으로 먹었는데, 우리나라 슈퍼마켓 팩초밥과 비슷한 맛이었다.; 어쨌든 새우를 섭취해서 만족했다. 과일은 후식으로 먹었다.

지난 며칠 동안 방에서 무선인터넷이 잘 되지 않아 꽤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연결되었다가 끊겼다가 하니 산만해서 더 신경이 쓰였다. - 오늘 오후에는 갑자기 굉장히 신호가 잘 잡힌다. 그래서 앉아서 웹서핑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갔다. 저녁으로는 우유 한 컵과 요거트꿀버터를 바른 빵을 먹었다.

어제는 빨래를 했는데, 널면서 보니 어째서인지 양말 세 켤레가 다 한 짝 밖에 없다. 세탁기에는 두 짝을 넣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보통 양말은 벗어서 그때그때 빨래통에 넣어 놓으니 한 짝만 있을 이유가 없는데 대체 왜 세 켤레나 짝이 사라졌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세탁기 안에 남아 있나 들여다 봤는데 없었다. 사실 어제 밤에 주인 아주머니가 세탁기 안쪽에 붙어 있던 한 짝을 갖다 주셨다. 나머지는 어디에 간 걸까?

이제 씻고 잠깐 쉰 다음 학원 숙제를 하고 원고를 할 계획이다. 원래 원고에 관해 쓰려고 했는데, 옆길로 새서 일상 잡담이 되었네. 글의 앞과 뒤가 미묘하게 어긋난다.

댓글 1개:

  1. 동양철학 전공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입니까(...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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