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7일 금요일

2007년 7월 27일 금요일

6:45 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앗, 조금 늦게 일어났네 싶었지만, 사실 이것도 이르다. 이쪽 동네에서는 오전 8시 이전과 오후 10시 이후에는 샤워를 하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들었는데, 단지 생활 리듬상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오전 8시 이전에는 '이 사람들은 새벽에 화장실도 안 가나...'싶을 만큼 건물 전체가 조용하다. 밖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제도 일찍 일어났으면서 조용히 시리얼 타서 방에 앉아 먹은 다음에 씻었고 오늘도 일단 냉장고에서 버터부터 꺼내 녹이며 인터넷;을 했다. 어학원에 다니고부터는 일어난 다음에 예습을 하다가 씻고 아침 식사를 하고 수업을 받으러 나가면 (9:30) 딱 맞을 것 같다.

방에서 조용히 가방을 싼 다음 그제 사 놓은 빵과 햄, 버터, 우유로 아침식사를 하고 (시리얼은 도저히..ㅠ_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나가려다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크로스백은 너무 작다. 짐이 되더라도 캔버스 백을 가지고 가야겠다. 함부르크의 오늘 최고 기온은 25도, 흐리고 비가 온단다. 우산도 챙기고 사과도 하나 넣었다.

9:18 에 베를린 중앙역에서 출발하는 고속철(ICE)을 탔다. 함부르크 중앙역 까지 직행으로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걸린다. 척 보기에도 배낭여행객 같은 사람을 따라서 탔는데, 타고 20분 정도 지나서 흡연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다지 긴 거리가 아니니 그냥 있기로 했다. 사과를 먹은 다음 창 밖 경치를 적당히 구경하다가 나중에는 졸았다. 함부르크 역에 도착하니 열시 오십 분이다.
710
10:50
기차에서 내려 역내를 한 바퀴 돌아 본 다음 함부르크 인포 센터에 가서 시내 지도를 받았다. 함부르크에서는 시내 교통이 모두 무료이고 미술관 등의 입장료 할인이 되는 함부르크 카드를 8 유로에 팔고 있다. 나는 필요 없을 것 같아 사지 않았지만, 아침 일찍부터 함부르크를 꼼꼼히 돌아볼 사람에게는 꽤 좋겠더라. 여러가지 사설 투어 버스 요금 할인도 된다.

11:25 역사에서 나와 보니 역 바로 앞에 'Top Tour Bus'라는 2층 버스가 서 있었다. 11시 30분에 출발이라고 쓰여 있기에 나도 가서 탔다. 설명을 들으면서 함부르크 시내를 돌아 보는데 영어와 독일어로 똑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해 주어서 준비 없이 갔는데도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어 꽤 재미있었다. 함부르크는 강과 호수로 유명한데, 버스를 타고 중앙역에서 조금 나가자마자 호수가 보였다. 백만장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와 많은 돈을 순식간에 없애고 싶으면 가 볼 만 하다는 고급 상점가도 지났는데, 그런 곳을 지나면서 가이드가 이런 곳도 있지만 함부르크의 시내에 노숙자들이 많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특이했다.

그런데 너무 추웠다.; 도중에 비가 조금 내려서 버스를 세우고 2층에 차양을 덮었는데, 그러고 나자 또 금세 비가 그쳐서 또 서서 차양을 걷었다. 긴 팔 웃옷을 여며도 추웠다. 12시 쯤에 1897년에 세워진 시청사에서 잠깐 내렸다. 이 투어 버스는 중간에 내렸다가 나중에 오는 차를 타도 되는 시스템인데, 오늘 돌면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내가 탄 버스 말고 비슷한 다른 버스들도 모두 같은 식으로 운영되는 것 같았다. 어제 본 빨간 베를린 시청사가 진지한 느낌이라면, 이쪽은 왕국! 이라고 소리치는 듯 화려한 건물이었다. 영국의 버킹엄 궁보다 방이 6개가 더 많다고 자랑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 전에 백만장자 동네의 공원을 지나면서도 영국의 하이드 파크를 언급했었거든.

12:20 시청사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사람이 좀 모여 있는 Kumpir라는 노상 감자가게에 가서 커다란 감자와 커피를 주문했다. 대개 맥주나 주스를 곁들여 마시고 커피는 마시지 않던데, 감자를 먹어 보니 단연 차가운 음료가 어울려서 역시나....싶었다. 내 주먹 두 개 보다 큰 찐감자를 반으로 갈라 치즈를 끼우고 소스(선택가능)를 뿌려 준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나니 좀 덜 추워진 기분이었다. 때맞춰 온 다음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번 버스의 가이드 아저씨는 설명을 (알아듣기 어려운) 독일어로만 한다! 에이, 하며 다음 하차지점인 St. Michaelis Church에서 내렸다. 함부르크의 랜드마크로, 1751년에서 1762년에 걸쳐 지어진 '독일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바로크 양식 교회'라고 한다.

12:55 너무 추워서 교회 안에 들어갔다. 교회의 높은 탑에는 입장료를 내면 들어갈 수 있고, 예배당 입장은 무료다.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규모와 분위기에서 뭔가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래 전에 지어진 고풍스런 건물 이상의 의미가 없다. 게다가 교회는 대체로 사람을 '내려다보는' 느낌으로 지어져 있다 보니 안에 있으면 묘하게 불편해진다. 그에 비하자면 성도 노동력 착취의 결과로 만들어진 권력의 상징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성에 사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건물이라는 점에서 그런 불편함은 없다. 교회 건물에 들어갈 때 마다, 엄청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믿지 않으면서 교회에 가거나 성경을 읽으면 지옥의 불길에' 어쩌고 했던 중학생 시절 짝궁이 떠올라서 웃음이 난다. 그 때는 황당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안스럽다. 그 애 덕분에 교회의 불편함이 불쾌함이 되지 않고 연민으로 대충 상쇄되니 다행인가. 어쨌든 진심으로 존중하며, 매우 경건한 표정으로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왔다. 실내라도 넓고 천정이 높다 보니 추워서 별로 있을 필요가 없었다.

다음 버스를 타고 섹스숍 거리를 지났다. 가게들의 간판이나 전시물, 카바레의 포스터는 섹스숍 분위기였지만 낮시간이다 보니 그 밑으로는 커다란 배낭을 맨 여행객들이 걸어가고 있어서 언밸런스한 느낌이었다. 이어서 선착장, 피쉬마르크트, 함부르크 던전 등을 죽 돌았다. 버스 프로그램과 배표 할인이 연게되어 있었는데, 다음에 와서 타 보기로 마음 먹었다. 강과 호수가 어디서나 보이니 기분이 좋았다. 이번 버스도 독일어로만 설명을 했지만 훨씬 알아듣기 쉬웠다. 관광객 중에 외국인이 거의 없어서, 영어 설명을 들으려면 탈 때 언급을 해야 할 것 같다. 첫 버스에서는 내 앞에 중국인 부부가 있었고, 나도 타면서 영어로 코스와 설명에 관해 물었기 떄문에 영어로도 설명을 해 준 듯. 이후 두 대에서는 외국인이 나 혼자였고 내 또래의 학생으로 보이는 독일인 아가씨 무리 뒤에 은근슬쩍 끼어 탔었다. 원칙적으로는 영어와 독일어 가이딩이다.

2:00 경에 함부르크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시간표를 뽑아 보니 세 시 육 분에 베를린으로 가는 ICE가 있다. 바로 출발하는 기차도 있지만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역 주위를 돌아보다가 함부르크의 쇼핑가인 Sptalerstrasse에 한 번 가 보았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두 시 사십 분 쯤 역사로 돌아와 바디샵에서 갔다. 잃어버린 배낭에 젤/액체 화장품이 모두 들어 있었기 떄문에(보안검색....-_-) 계속 곤란한 상황이었다. 파운데이션이 없는 정도야 맨 얼굴로 다니면 되니 괜찮은데 립밤, 핸드크림, 바디로션이 없다 보니 입술과 손이 터 버렸다. 배낭이 돌아올 때 까지 참아 보려고 했으나 입만 열면 입술이 아플 지경이라 항복하고 새 걸로 샀다. 바디샵 점원이 계산대에 낸 신용카드를 보더니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여기 와서 지금까지 본 바에 따르면, '나 같은' 동양인은 정말로 드물다. 터키 같은 서아시아 계통은 흔한데 - 히잡을 쓴 사람도 매일 서너 명은 꼭 보았다 - 동아시아 계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렉산더 광장 같은 관광명소에서도 두 명 볼까말까다. 그래서 깜짝 놀라 어떻게 알았냐고 하자 카드의 이름 부분을 가리키며 가장 친한 친구가 한국인이라서 알아 봤다며 웃는다. 덤으로 바디크림 샘플도 받았다.

3:06 기차를 타고 베를린에 돌아왔다. 기차 안에서는 사전을 보며 또 문장 만들기 시뮬레이션 놀이를 했다.
4:39 베를린 중앙역 도착. 알렉산더 광장에서 지하철로 환승해서 집에 돌아오니 다섯 시 사십 분이다. 오늘도 적당한 수준의 모험을 해서 흐뭇하다. 고속철도와 S-Bahn을 새로이 타 보았고, 2층 버스도 처음 타 봤다. 돈 내고 들어가는 공중화장실에도 두 번 갔다. 그런데 오늘 하루 종일 한 독일어는 'Kumpir Origianal und eine kleine Milchkaffee, bitte'와 할로, 당케, 튀스밖에 없네. 힝.

내일은 새미가 온다. 내일의 목표는 '식당에서 독일어로 음식 주문하기'와  'Rossmann이나 DM같은 저렴한 화장품 가게에 가서 스킨(Gesichtwasser)과 크림(Tagescreme) 사기'이다. (<-처음부터 와서 살 생각이었기 떄문에 배낭에도 없었는데, 깜박 하고 사흘동안 조그만 샘플을 아껴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리들에 가서 '물과 식료품을 사고 페트병 보증금에 관해 알아오기'도 해야 하는데 이건 아직 시뮬레이션을 안 해 봐서......

9:00 샤워를 하고 늦은 저녁으로 들어온 첫날 집주인이 주었던 과일 (배와 오렌지)을 까먹었다. 배를 깎고 있는데 - 그런데 서양배도 우리 것처럼 깎아 먹는 게 맞나? 껍질을 먹어 봤더니 너무 맛이 없어서 칼로 깎긴 했는데 칼을 잘못 고른 건지 잘 안 깎인다 - 주인 아주머니가 주방에 들어오신다. 세탁기를 써도 되나요? 하고 묻는데 달프 이히 이어레 바쉬마시네-까지 말했는데 문제 없어요, 하고 답해 버린다. 세탁기에 use라는 뜻의 동사로 benutzen을 쓰면 되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쳤다. 아주머니가 다친 손가락을 보여주며 'I have a problem' 이라고 하며 웃었다. 그런데 방에 와서 생각해 보니 오 디어니 쏘리니 할 게 아니라 투트 미어 라이드(Sorry)-라는 왕기초 회화를 할 절호의 기회였잖아! 아우. 어쨌든 오늘 한 독일어에 구테 아페티트(맛있게 드세요)도 추가. 참, 생각해 보니까 에스반에서 슐디궁(실례합니다)도 했다.
아차차, 과일 고맙다고 하는 걸 깜박했다. 첫날 방에 놓인 과일을 보고 장식인 줄 알아서 미처 인사를 못 했었다. 마지막 남은 걸 먹는 참이었으니 타이밍이 좋았는데.

벌써 아홉 시 반이 넘었으니 오늘은 일단 자야겠다. 하지만 내일과 모레에 반드시 C사 원고를 해야 한다. 오기 전에 이 글이 잘 안 풀려서 굉장히 괴로웠는데, 이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쓴 만큼 열심히 벌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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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지출

화장실 (WC) 1,20
일회 승차권x2 4,20
점심(감자+커피) 5,00
함부르크 투어 버스 14,00
바디샵(바디로션/립밤) 16,00

댓글 3개:

  1. 독일 가셨군요.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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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제이님, 서양배는 껍질 채 먹어도 맛있답니다.^^

    제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밍밍한 속과 시큼한 껍질 부분의 조화가, 서양배의 매력인 것 같아요.

    그나저나,

    먼 곳에 가 계십니다.

    건강하시고, 많은 것들을 맛보고 오시길 기원해 봅니다.



    수줍은,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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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lue0711 - 2007/08/07 09:27
    앗, 그렇군요. 멀리 왔으니 이것 저것 많이 먹어보고 돌아가겠습니다!(...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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