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13일 화요일

2004년 7월 13일 화요일 : 잡기

비가 주룩주룩 온다. 머리가 아팠다. 며칠 전에는 다리가 아팠고, 어제는 배와 어깨가 아팠고, 오늘은 머리가 아프다. 이제 머리카락이 아픈 다음에 아무 곳도 아프지 않는 단계가 올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픈 것보다는 발끝부터 머리까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통증이 위로 빠져나간다니, 득도하는 기분이라 나쁘지 않다. 이 통증은 비구름을 뚫고 가속을 받아 탈출속도를 넘어서서 우주로 날아갈 것이다. 독서실 사물함을 뒤져 보았지만 소화제만 있고 두통약은 없었다. 사실 독서실 맞은편에 십 년도 넘게 고시촌을 지켜온 우리의 친구 아림약국이 있지만, 겨우 두통때문에 약을 사먹기는 귀찮다.

글을 잘 쓰고 싶다. 나이가 어려 부족한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나이도 어리고 부족하기까지 하다는 것은 어쩐지 비참하다. 주어와 동사가 편두(偏頭)에서 줄을 돌리자 형용사와 부사가 뛰어와 줄넘기를 한다. 머리를 몇 번 흔들어 본다. 귀가 울린다. 나는 방향감각이 형편없다. 이 사실을 아는 데 몇 년이 걸렸다. 중학교 신체검사에서 나는 청력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오른쪽에서 소리가 들리면 오른손을 들고, 왼쪽에서 소리가 들리면 왼손을 들어야 했는데, 이 방향을 계속 틀렸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낄낄대던 아이들은 내가 정말로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차츰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얼굴을 찌푸리고 기록부에 '정상'이라고 적어넣은 다음 나를 제 자리로 들여보냈다. 지나는 말로 병원에 가 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사실 귀찮을만큼 소리를 잘 들었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서 안방의 TV소리를 들었고, 방 안에 누가 손목시계라도 두고 간 날이면 끝내 찾아내어 문 밖으로 치워야 잠이 들었으며, 4분단 끄트머리에서 1분단에서 수다를 떠는 아이들의 말소리를 분간해 낼 만큼 예민했다. 그래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대신 나는 길을 쉽게 잃어버렸다. 오른쪽 왼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지하철 방송에서 내리실 문이 왼쪽이라고 하면, 나는 일단 몸에 힘을 빼고 지하철이 가속하는 방향을 잡은 다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양 손가락으로 '가'자를 그려 본다. 잘 그려지는 쪽이 오른쪽이다. 다른 사람들은 글자를 써 보지 않아도 오른쪽과 왼쪽을 구분한다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나는 누가 길을 물어보기라도 하면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서 방향부터 확실히 해 본 다음에 설명해 준다. 그러지 않으면 손짓과 말과 시선이 제멋대로 논다. 이런 내가 길안내 활동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2인 1조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돌이켜 생각하면 그 곳에서도 나는 민폐거리였다. 지금까지 남을 돕겠다고 나서서 제대로 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공부는 하는 것 같았는데 시험에 떨어져 버렸다. 제대로 한 일이 없다는 말을 하니 생각나는데, 오늘 아침에 이불을 개어 놓지 않고 나온 것 같다. 아니, 개었던가? 머리가 멍하다. 흔들, 흔들. 어쨌든 나는 의욕만 넘칠 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인간은 아니다. 집에서도 그렇고 밖에서는 더 심하다. 내가 아이를 낳아 보고 싶다고 하자, 오래된 친구 모양은 진심으로 그 아이의 미래를 걱정했다. 나도 걱정스러웠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많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손에 쥔 것을 놓을 줄 몰랐다. 앞에 등장한 모양은 내가 사회복지를 전공으로 택했을 때에도 진심으로 당황했다. 걱정이 많은 친구였다. 하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목이 뻣뻣하다. 오전에는 책상에 엎드려 푸우 쿠션을 끌어안고 잠시 졸았다. 정장을 하고 마이크를 든 푸우 선생이 나타나서 하자의 치유와 전환에 대해 설명했다. 정장과 노란 얼굴이 영 어울리지 않았다. 행정수도 이전 헌법소원이 제기되었다. 2004년 하반기 주요 판례가 하나 늘었다. 여기는 독서실. 옆 책상에서 행정법 동영상 강의를 듣던 사람은 책을 펼쳐놓은 채 나갔다. 그 옆의 남자는 아까부터 싸이질을 하고 있다. 내 뒷자리 사람은 주식 시세를 들여다본다. 이천사년칠월십삼일비오는중부지방어느독서실지하일층. 어둠은 눈앞에 있지만 밤은 아득히 멀다.

댓글 8개:

  1. 웬지 문체가 루크스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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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왜 글을 잘쓰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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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글이냐 이겁니다. 예를 들어, 난 말을 조리있게 잘하고 싶다, 요리를 잘하고 싶다, 운동을 잘하고 싶다, 노래를, 컴퓨터를, 그림을, 악기연주를... 정말 많잖아요. Jay님도 그렇게 잘하고 싶은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닐테고. 그런데 하필이면 왜 글을 잘쓰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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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다윗 왕의 반지에는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라고 쓰여 있었다 합니다.



    그리고, 건강 조심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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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전 요리를 잘하고 싶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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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ihong/ 말도, 요리도, 온동도, 노래도, 컴퓨터도, 그림도, 악기 연주도 이미 다 잘하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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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라슈펠님/ 그렇죠!

    ihong, 으네님/ 14일 일기 참조.

    뎡만님/ 이 뎡만님은 지정X님, 조X님, 냥X님의 홈페이지에 등장하셨던 바로 그 분?!?! 반갑습니다. 그리고 말씀 고맙습니다.

    안나님/ 저는 요리 잘하는 동생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괜히한번우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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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그 뎡만 맞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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