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21일 목요일

2006년 9월 21일 목요일 : 검은 고양이

오전에는 화실에서 베티 데이비스를 이어 그렸다. 니콜 키드먼을 그리고 싶었는데, 출력해 놓은 사진을 토요일에 집에 두고 나왔기 때문에 일단 잡지에서 골랐다. (이 사진은 오늘 가져 갔다.) 베티 데이비스도 좋지. 루비치 감독님 영화가 또 보고 싶구나.

화실 오가는 길에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매혹]을 읽었다.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의 삼각관계를 다룬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프리스트의 책 중에서도 이런 것이 출간되는 데에는 역시 기획자의 공이 크다. 읽으면서 새삼스레 감탄.

번역 하니 생각나는데, 내가 요즈음 (마음 속으로) 작성하고 있는 '미묘한 쾌감' 목록에 번역과 관련된 항목도 있다. '미묘한 쾌감'이란 주 활동의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활동에서 느끼는 오묘한 즐거움이다. 예를 들어, 검은 파스텔로 그림을 그릴 때는 지우개를 흰색 재료처럼 사용한다. 그런데 파스텔은 가루가 많이 나고, 특히 검은 파스텔은 검은색 건식 재료 중에서도 가장 짙기 때문에 작업을 하다 보면 지우개가 금방 새까맣게 된다. 그래서 평소에 지우개를 왼손에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열심히 밀어서 가루를 밀어 내는데, 이렇게 하면 새까맣던 지우개가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따끈따근해진다. 이게 바로 미묘한 쾌감!

번역의 경우, 치졸한 악당의 비열한 언사를 번역할 때 미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책을 읽을 때는 악당이 나오는 부분을 참 싫어해서 그냥 '이 사람은 지금 나쁜 말을 하고 있구나.' 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만 훑어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 중에도 타고난 리더가 있다면요?” 알드린이 물었다.
크렌셔가 코웃음 쳤다. “자폐인들이 리더라고? 농담 마시오. 그들에게는 리더가 될 자질이 없어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지.”
이런 악당의 말을 직접 쓰고 있으면, 참으로 희안하게도 기기묘묘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악당이 너무 거대하거나 최후의 승리자라면 재미 없겠지만, 나는 너무 강하고 잔인한 악당이 나오는 글은 맡지 않으므로(그냥 취향이다.)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다. (초고를 검토하기 위해 이런 부분을 다시 '읽을' 때에는 이런 미묘한 쾌감이 없다.)

화실 수업 후에는 종로 카페 뎀셀브즈에 가서 원고를 하다가, 오후 여덟 시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B영화의 제왕: 에드가 G. 울머 회고전' 프로그램인 [검은 고양이 (The Black cat, Edgar G. Ulmer | 1934ㅣ미국ㅣ65minㅣB&W)] 를 보았다.

상영 전에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울머의 작품 세계를 간단히 소개했다. [검은 고양이]에는 건축과 철학을 전공했던 울머의 건축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주인공이 유명한 건축가로 나온다.) 또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집어 넣은 성적 코드들과 카메라의 움직임에 주목해 보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이는 실제로 감상하기 전에 듣지 않았다면 놓쳤을 부분이다. 울머가 [검은 고양이]를 제작한 다음에 대형 스튜디오인 유니버셜을 떠났던 이유는 스크립트 걸과 연애를 하다가 간부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란다. (...) 울머는 B급 SF영화도 많이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호러만 상영되어 조금 아쉽다. 그래도 서울아트시네마가 아니라면 DVD상영이라 해도 30년대 공포영화를 어디 스크린에서 볼 수나 있겠어.

영화는 보러 가길 잘 했다 싶었다. 워낙 공포물을 싫어해서, 이번에는 'B급'이라는 타이틀, 30년대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짧은 러닝 타임을 보고 한 번 도전해 보자는 심정으로 갔는데, 검열이 있던 시대 작품이라 잔혹한 장면이 나오지 않아 편하게 보았다. 박사가 자신의 동족을 배신하고 아내를 죽였던 포울직을 묶어 놓고 '살갗을 벗겨 주겠다'고 한다. 놀래서 눈을 후딱 가렸다가, 조용하기에 살짝 내다 보니 찰흙 소조를 조각칼로 다듬는 것 같은 그림자가 잠깐 나오고 넘어간다.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의 삼각관계를 다룬 인상 깊은 작품으로, 잔인하다기보다는 무척 슬펐다. 과거 격전지/훈련장이었던 지하실의 구조와, 여자 시체를 세워 놓은 관들이 강렬했다. 번쩍이는 기하학적 건물이나 차가운 유리관이 음습하고 축축하게 느껴져 신기했다. 그리고 칼로프와 벨라 루고시 두 사람의 존재감이 굉장히 강해, 과장된 움직임에도 '과잉'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온 영화를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낮에 종로로 가는 버스 안에서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의 삼각관계를 다룬 인상 깊은 작품......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 15권을 읽었다. 이번에는 캐릭터 북, 메모지, 상자로 구성된 한정판도 나왔다. 메모지가 노다메가 치아키에게 달려갔다가 내던져지는 내용의 플립북(flipbook)이라, 아무래도 한 장씩 떼서 쓰지 못할 것 같다. 캐릭터 북이 파본이라서 한양문고에 전화했더니 11시 까지 영업한다기에, 영화를 본 다음 다시 홍대 입구에 가서 교환받아 왔다.

댓글 7개:

  1. 벨라 루고시를 참 좋아하는데 보러 갈 수 없을 듯 해서 유감이로군요-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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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헉...내용에 비해 참으로 얌전하고 정갈한 번역이셔요;; 저 같으면 저런 내용이면 무지 말투가 험악했을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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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란양/ 울머 회고전 연장 상영 결정! [검은고양이]는 10월 1일(일요일) 오후 4시야. 벨라 루고시 x 카를로프 투톱의 카리스마가 굉장하고 그렇게 긴 영화도 아니니, 추석 연휴를 기해 한 번 보러 가 보는 것도 괜찮겠네. :)

    고양이님/ 사실 저도 그런 충동을 무지 느껴서, 조금만 방심하면 개자식 소리 들어갑니다.(...) 크렌셔 씨가 점잖은 척 하는 사람이다 보니 아쉽지만(으응?) 꾹꾹 참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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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개자식"이 무척 인상적이군요(…)



    에드가 G. 울머는 (블로그에도 썼지만) [우회]를 봤는데,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네요. 몇 개월 전 자크 투르네 때는 미처 몰랐던 고전기 할리우드 B무비의 매력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요. 오늘 (전에는 약간 실망했던) 투르네의 [캣 피플]을 다시 봤는데 이렇게 좋은 영화였던가 싶어 깜짝 놀랐습니다.



    고전기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는 직접적으로 잔혹한 건 하나도 없으니 꾸준히 관심을 둬 보시는 것도 좋을 거예요. 돈은 없고, 분위기는 만들어야겠고, 그럴 때 영화가 기댈 수 있는 건 독특한 조명과 세트, 카메라 위치 정도인 것 같은데, 그 덕분에 결과물은 굉장히 '원초적'인 영화라는 느낌을 주더군요.



    …[검은 고양이]도 보고 싶은데 못 봐서 Jay 님 부럽단 얘기죠.



    전도사적 여담 : 벨라 루고시 + 보리스 칼로프 영화는 작년에 유니버셜에서 출시한 [The Bela Lugosi Collection]에 좀 수록되어 있네요. 콜렉션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한 장 짜리 DVD인데, 수록된 다섯 편 중 네 편에서 루고시와 칼로프가 함께 나온다고 합니다.



    그나저나 지금 루고시 필모그래피를 한 번 훑어봤는데 놀랍게도 [니노치카]에 출연했군요! 대체 어떤 캐릭터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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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우회]는 3일에 보러 갑니다. sabbath님 글을 보고 나니 더욱 궁금해지더군요. 사실 이번 회고전에선 [우회]와 [검은 고양이] 두 편만 볼 생각이었는데, 연장 상영을 하니 혹하네요.



    [니노치카]에서는 라미찐 역이었네요! 높은 분이었다는 것만 기억이 나고, 등장 장면은 전혀 떠오르지 않아요.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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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그나저나 울머가 유니버셜에서 쫓겨난 이유요, 저도 김성욱 프로그래머 강연 때 들었는데 정확히 기억을 못 하고 있었거든요? (누구랑 연애하다가 발각되자 다른 지역으로 함께 도피했다는 것까지만 기억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스크립트 걸하고 연애했다고 쫓겨나는 건 이상하게 여겨져서 (사내연애가 금지됐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스탭과 연애했다는 죄로 실력있는 감독이 완전 퇴출당한다는 건…) IMDB를 찾아보니 이렇게 나오네요.



    "Blackballed from Hollywood work after affair with Shirley Castle, wife of a Universal studio mogul."



    그럼 그렇지. 이 정도는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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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럴 수가! 30년대라서 사내 연애 금지였단 말인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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