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2일 토요일

2006년 9월 2일 토요일 : 잠자는 파리 / 네 멋대로 해라

오전 열 시부터 학교 세미나실에서 학부실습최종세미나를 했다. 이번 여름학기 실습생은 열네 명 정도였다. 모두들 한 달이나 현장에서 일한 만큼 할 말이 많았다. 여러 기관의 사업이나 업무 현장, 실습 내용 등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어 무척 재미있었다.

원형 탁자에 앉은 순서대로 발표를 했는데 하필이면 내 자리가 반대편 끄트머리가 되어, 내 차례가 왔을 때에는 발표에 주어진 시간이 거의 없었다. (오후 두 시 부터는 대학원실습세미나가 있었다.) 일 주일도 전부터 PPT를 만들고 최종 보고서 개요를 짜며 준비했던 내용을 "시간이 없으니까 이 부분은 생략하고..." 라고 통과하려니 속이 쓰렸다. 세미나는 두 시 십 분 쯤 끝났다.

학교에서 광화문 시네큐브로 이동, '팡테옹 뒤 시네마 프랑세' 프로그램인 르네 끌레르(Rene Clair) 감독의 1927년 작 [잠자는 파리 (Paris qui Dort/ n&b, muet, 35')]를 보았다.

파리 전체가 갑자기 멈춘다. 움직이는 사람은 하늘 높이 올라가 있던 에펠탑 관리인과 비행기에 타고 있던 다섯 명(여자, 비행사, 도둑, 경찰(?), 신사) 뿐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했으나 곧 잠든(?) 사람들의 돈이며 보석을 챙기고, 마음껏 술을 마시는 등 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두가 잠든 세상에서, 돈과 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이들은 에펠탑에서 치고 박고 싸우다가 -심심해 하며 술이나 마시다 보면 싸움이 나기 마련이다- 이하 스포일러. 확성기를 통해 '이 말이 들리는 분은 손수건이 걸린 창 앞으로 와 주세요'라는 방송을 듣는다. 시내로 나간 이들은 정말 손수건이 걸린 창문을 찾고, 그곳에서 역시 깨어 있는 여자를 만난다. 알고 보니 파리를 잠들게 한 사람은 이 여자의 삼촌인 한 괴짜 과학자 할아버지였다. 그가 연구실에서 내뿜은 이상한 광선을 받아 파리가 잠이 들었고, 하늘에 있던 여섯 명만이 광선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과학자를 협박해 다시 파리를 움직이게 하고 밖으로 나간다.(커다란 레버를 당기면 된다.)

그러나 과학자의 조카딸과 그새 사귄 애인(?)은 과학자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린 사이에 레버를 거듭 돌려 파리를 멈추고, 그 사이에 돈을 훔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허나 과학자는 자신의 발명을 자랑하지 않고 못 배기는 법! 커플이 돈을 가져가려는 순간, 동료 과학자에게 자신의 실험에 대해 설명하던 과학자가 다시 레버를 돌린다. 경찰서에 잡혀 간 커플은 경찰서에 이미 와 있는 일행들을 다시 만난다. 이들은 파리가 멈췄다는 둥 떠들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잡혀 들어가는데, 그 때 또 파리가 잠시 멈춰 재빨리 도망친다.


프로그램에는 27년 작이라고 되어 있으나 IMDB에는 25년 작이라고 나온다. 잠든 파리 시내의 모습 -사람들이 행동하던 그대로 멈추어 있다-과 에펠 탑에 매달려 체조하는 것 같은 격투 장면 등이 인상깊었다. 칠판에 ax+2b+c=0 어쩌고를 열심히 써내려가는 과학자, 남장풍 정장을 입은 여성, 장광설을 늘어놓는 도둑, 까탈스러운 신사 등 겨우 35분 안에 전형적인 캐릭터를 선명하게 묘사해 낸 점에도 감탄했다.

그 외에 80여년 전 작품임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도,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공항이 잡초밭이고 비행기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1차대전 자료사진의 비행기처럼 생겼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는데, 날개가 2층으로 되어 있고 앞에는 작은 프로펠러가 달려 있는 형태.) 건물 배치나 옷과 장신구의 형태, 경찰들의 행동거지 등도 아, 저게 20년대구나, 하고 생각하게 했고.

상영 후에는 시네큐브 영화학교 여름학기 선생님이셨다는 한창호 님의 마스터클래스가 있었다.

강의 내용 정리


무척 유익한 강좌였다. 강좌명이 '프랑스 영화사 100년'이라서 백 년 치를 다 할 줄 알았는데, 20년대에서 60년대 까지만 다룬 것은 조금 아쉬웠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공부할 때는 (여러가지 책을 찾아 보는 일도 즐겁기는 하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로부터 말로 풀어 설명을 들을 때 훨씬 잘, 빨리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에는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중심으로 한 마스터클래스라, 이미 보았거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영화를 예로 들어 이해하기가 쉬웠다. 예전에 멋모르고 열심히 봤던 영화들이 시대적으로 어떤 사조를 따른 것인지에 대해서도 되짚어 볼 수 있어 즐거웠다. 다음에는 60년대 이후 영화나 헐리우드 영화에 관해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마스터 클래스가 끝난 뒤에는 시네큐브 옆에 있는 카페 쉐누에 가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무난한 샌드위치와 중상 정도의 커피를 파는 2층 카페이다. 늦은 오후 햇살을 받으며 샌드위치와 카페라테를 먹고 책을 읽었다. 혼자 온 손님 서넛이 각자 자기 일을 하는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으나, 흡연 카페라 여섯 시쯤 되자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저녁에는 궁님과 장 뤽 고다르의 59년 작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를 보았다. 목요일에 전션과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저녁을 먹기로 했었는데, 전션이 오늘 오후에 집안에 다른 일이 생겼다며 갑자기 약속을 취소했다. 거의 매진된 영화라 표를 취소하고 한 장만 다시 예매하는 대신, 이 영화를 볼 생각이라셨던 궁님께 연락해 보았다. 금요일 저녁에 예매 사이트가 잘 안 들어가진다고 하셨던 데다, 우리 쪽 예매가 더 앞섰으니 좌석 위치도 낫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궁님이 예매하셨던 자리는 우리 자리 바로 뒷 줄로, 별 차이가 없었다.;

여하튼 이 일기가 너무 길어졌으니 자세한 감상은 생략. 솔직히 한 줄로 요약해서 말하자면......그렇게 찌질한 남자 주인공은 진짜 처음 봤다. --; '한심하다'나 '멍청하다'가 아니라 '찌질하다'가 너무 딱 들어맞아서, 비극도 비극 같지가 않았다.

오전부터 계속 집중했던 터라 무척 피곤했는데 궁님이 데려다 주신 덕분에 편하게 귀가했다. 궁님이랑 네비게이터 만세다.

댓글 2개:

  1. 누벨바그의 특징 중에서 "촬영 면에서는 카메라가 잘 움직이지 않고, 편집도 가능한 적게 하여 최대한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자 한다."라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요;;; 특히 카메라의 움직임에 관한 이야기는요. (바로 윗 단락에서 언급하셨던 것처럼 '카메라의 경량화'라는 요소가 있으니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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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네, 저도 편집은 그렇다 쳐도 카메라 부분은 영 이상해서 -트뤼포나 고다르는 그냥 봐도 아니잖아요.;- 곰곰 생각해 봤는데,



    (1)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다는 게 아니라, 여러 대를 번갈아 쓰며 찍었던 스튜디오 영화들과 다르게, 촬영자의 손에 달린 카메라 한두 대만 써서 자연스레 움직였다는 의미. 즉 카메라를 잘 '바꾸지' 않았다는 뜻

    (2) (강의 초반부터 언급했던) 홍상수 감독의 특정 영화를 염두에 두고 무심코 한 말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편집을 가능한 적게 한다고 하셨던 말도, 실제로 [네멋]의 점프 컷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편집 자체는 굉장히 튀잖아요? 그러니까 편집의 '정도'를 말한 게 아니라 '시간성' 의 얘기를 하려고 하시다가 한국어가 살짝 꼬였거나 뭔가 순간적으로 착각하셨나보다 생각하기로 했어요. 고다르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실시간성(real time)이랄까, 현재성 이랄까 하는 부분이요. (여기에 대해서는 뭔가 정확한 영화 용어가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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