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5일 토요일

2004년 6월 5일 토요일


몹시 더웠다. 낮잠을 자거나 빈둥거리다가 일곱 시쯤 되니, 이렇게 아무 일도 안 하고 보낸 주말은 후회하기 쉽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보통 주말 저녁 7시나 8시쯤 되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 밖에 나가거나 영화를 본다.

노트북과 챙겨들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당장 염두에 둔 곳은 없었고, 그저 대충 홍대 쯤이면 앉아 일할 자리는 있겠지 생각했다. 해가 거의 졌으니 시원하리란 기대와 달리 여전한 열기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외출을 후회했다. 영등포구청장 재선거를 하러 간 Y교회가 유권자를 비세일 기간에 물건 사러 온 고객마냥 반갑게 맞아 당황스러웠다. 선거인 명부의 서명란은 대개 비어 있었다.

뭐하시냐고 낮에 문자를 보내 물었지만 답이 없던 동진님이 선거할 때쯤 전화하셨다. 신촌 그사람 카페에서 만나기로 결정. 투썸플레이스에서 화이트 초컬릿 스트로베리 케익과 애플민트 케익을 사고 기다렸다.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사람카페에 들어가 아이스커피를 손에 들고 나니 견딜 만 해졌다. 처음에는 매장 한가운데 탁자에 앉았다가 잠시 후 콘센트 옆자리가 비자 그 쪽으로 옮겼다. 앉고 나서야 전원 케이블을 아예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노트북 때문에 그사람카페에 고객이 사용 가능한 콘센트가 있는지 전화까지 해서 물어봤던 동진님은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이었다. 노트북님은 결국 간신히 스무 매쯤 끝낸 주인을 외면하고 자러 가 버렸다.

동진님은 '그냥'이(그사람카페의 고양이)를 솜씨좋게 데리고 놀았다. 그냥은 동진님이 흔드는 이어폰 한 쪽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쫓아다녔다. 내가 흔들자 쳐다보지도 않았다. 동물이 나를 먼저 좋아하는 경우는 지금껏 거의 없었고, 나는 마음에 드는 동물도 일단 무서워 했다. 이 점은 아기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노트북님도 주무시는 터에 무얼 더 하나. 동진님이 그냥이를 데리고 노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시 빈둥거렸다.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인데도 혼자 모니터 앞에 앉아 감자면 짜장범벅을 먹으며 빈둥거리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즐겁게 느껴졌다. 케익과 커피 덕분인지도 모른다. 옆 자리에 앉은 사진 찍는 사람들이 계속 담배를 피워댔지만, 있지도 않은 전원 케이블 때문에 자리를 옮겼던 내 탓이라 생각하고 참으며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 로모는 갖고 싶어했고, 액션샘플러에는 한 번도 관심이 없었다. 매장에 포토넷 6월호가 있어 자유기고가 정상돈님의 여행할 때 전자기기 사용하는 방법을 읽었다. 파리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여행기보다는 전구 소켓에 연결하는 전원을 사라거나 발목 부분을 잘라낸 팬티스타킹을 챙기라는 여행기가 훨씬 좋다.

열 시쯤 집에 왔다.

댓글 2개:

  1. 발목 부분을 잘라낸 팬티스타킹을 어디다 쓰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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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두툼한 검은색 팬티스타킹의 발목 자리를 잘라 똘똘 말아 넣어 가면 추울 때 유용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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