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11일 금요일

2004년 6월 11일 : 소통의 문제

문장이 극도로 난해한데다 별로 팔릴 것 같지 않은 작가의 번역을 맡아 고심하는 꿈에서 반쯤 빠져나온 상태로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아우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 *
아우님: 언니야, 교보문고 카드 있으면 나 좀 빌려 줄래?
나: 저어어어 내 지갑 열어 보면 있어......지갑 맨 뒤쪽 칸에. (1)
아우님 부스럭거리다.
나: 지갑 연 김에 민증도 가져가. (2)
아우님: 교보문고 카드 쓸 때 신분증 필요해? [필요 없잖아?]
나: 아니이. 시공사 갈 때. (3)
아우님: 시공사는 토요일에 갈 건데. (3')
(부연설명: 오후 선물을 받으러 시공사에 가야 한다. 어제 밤에, 시공사 건물이 아우님의 학교 근처라 그 위치를 알고 마침 토요일에 학교를 가는 아우님이 받아오기로 했다.)
나: 그래, 그러니까 지갑 연 김에 미리 꺼내 가라고.(4) (잠이 조금 깨서) 나중에 잊어버리지 않게 네 지갑 안에 넣어 놓으면 되잖아. (5)
아우님: 그렇게 부연 설명 안 해도 알아.(5')
* * * * *

나는 '큐우우웅'한 다음 아우님에게 '자다 일어나 아우님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 부연 설명 안 해도 알아서 알아 듣는다는 말이라니, 그런 식으로 대답할 것 까진 없잖아.'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우님은 뜻밖에도 '나도 마찬가지야. 언니 말도 내가 들었을 때 기분은 별 차이 없어.'라며 잔소리를 한 나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조악한 예 ㅡ '네가 만약 누구한테 천 원을 빌려 주면서 '내일까지 꼭 갚아'라고 했더니 빌려가는 사람이 '그렇게 말 안해도 알아서 갚아.'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냐' 라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뭔가 적절치 못한, 자다 깬 머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예 ㅡ를 들며 진짜 잔소리를 보탰다.

그리고 아우님의 말대로 내 쪽에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었는지, 아우님의 주장처럼 불필요한 부연 설명을 했는지에 대해 누워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1) 지갑 맨 뒤쪽 칸에 - 지갑을 뒤적거리는 것이 싫어서 다른 부분은 손대지 않게 하기 위해 한 말이다.

(2) 지갑 연 김에 민증도 가져가. - 처음부터 민증 이야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내가 민증도 가져가라고 한 이유는 (5)번 이지만, 아우님은 내가 마치 아우님의 기억력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교보문고 카드를 빨리 챙겨 할 일을 해야 하는데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것까지 신경쓰라니 성가셨을지도 모른다.

(3) 시공사 갈 때. - '아니.'까지만 말한 다음에 아우님이 '그러면 왜?'라고 묻기를 기다렸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고 말한 순간 아우님은 '아, 시공사 때문에 그러는 구나.'라고 깨달았을 수도 있는데 내가 굳이 먼저 말을 붙여 마음을 상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4) 그러니까 지금 연 김에 미리 꺼내 가라고. -
(a) 아우님은 내가 (3)번 말을 할 때까지 시공사 때문에 민증을 가져가라고 하는 줄 몰랐다. 하지만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해 봐도 내일 가는데 지금 꺼내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3')로 답했다. 이 경우 (4)는 잔소리가 된다.
(b) 아우님은 처음부터 시공사에 가져가야 할 민증 생각을 했으며, 토요일에 갈 테니 그 때 가져가야겠다고 결정을 내려 (3')로 답했는데, 내가 굳이 거듭 가져가라고 했다. 이 경우 (3), (4) 모두 잔소리다.

(5) 나중에 잊어버리지 않게 네 지갑 안에 넣어 놓으면 되잖아. -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불필요한 말이다. 내가 잊어버릴 때를 대비해서 미리 챙겨놓으라고 했다는 것은 (4)까지의 대화에서 당연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그렇다면 나의 행동 대안은
1. 처음부터 민증을 가져가라고 하지 않는다.
2. 만약 가져가라고 했더라도 일단 (3)을 빼고 동생이 생각하기를 기다린다.
3. 동생이 (3')로 답한 다음에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토요일에 챙기면 된다. 만약 나와 동생이 깜박 잊어도,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니 다음에 가면 된다.
4. (4) 말을 한다면, '미리 챙겨 놓으면 좋잖아.' 라거나 '내가 혹시 까먹고 안 줄까봐 그래.' 같은 보다 완곡한 표현을 사용한다.
5. (5)는 생략한다.

-> 아우님의 행동 대안은
굳이 (5')처럼 말할 필요가 없다. '알았어.'나 '그래'라고만 답했으면 양쪽 다 무심코 넘어갔을 대화이다. 만약 (4),(5)가 모두 잔소리인 상황이라 마음이 상했다 하더라도 일단 '그래.'라고 하고 넘어가고, 기분이 나빴다는 것을 내개 알리고 싶다면 내가 정신이 든 다음에 차분히 앉아 이야기해 보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3')에서 만약 (4)-b까지 생각한 상태였다면, 미리 '내일 가져 갈게.'라고 덧붙여야 오해의 소지가 적다.

대충 정리+ 납득. 그러면 아점 먹으러.

댓글 4개:

  1. 간단하게 '퍽!'하고 주먹을 날리거나, '콰악!'하고 발길질을 한 번 해댔다가... 두터운 하드커버로 자다가 이마를 한 대 맞는 편이 간단했을텐데요. 정말 사이좋은 자매로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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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ihong/ 아우님이 착한 덕분이져.

    onesound, nyxity/ 큐웅 큐웅 큐웅 큐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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