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8일 목요일

2005년 9월 8일 목요일 : 수원시립교향악단 제 157회 정기연주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교향시 “영웅의 생애” 작품 40.
Symphonic Poem "Ein Heldenleben" op.40
안톤 드보르작 / 첼로 협주곡 나단조 작품 104
Cello Concerto in b minor op.104
지 휘 : 박은성
협 연 : 율리우스 베르거 (첼로)

'슈트라우스의 밤'을 주제로 슈트라우스의 '돈 키호테'를 연주한다기에 일찌감치 예매하고 손꼽아 기다렸던 수원시향 공연이었다. '돈 키호테'의 전곡 실연은 지금껏 들은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근래 다른 교향악단에서 기획한 것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목적은 오로지 이 곡 하나였다. '돈 키호테'에 거의 홀린 나머지, 다른 교향시 '영웅의 생애'도 프로그램에 있다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당일, 터질까봐 걱정 될 만큼 뚱뚱한 가방을 짊어지고 아픈 발을 끌고, 오로지 '돈 키호테'를 한 번 듣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관악산과 우면산을 넘어 예당에 갔다.

프로그램이 변경되어 있었다.

발권대에 가서야 그 소식을 듣고 - 공연장 로비에 곡목 변경 안내가 붙어 있긴 했으나 유심히 보지 않고 발권대로 직행했었다 - 순간 눈 앞이 핑 돌았다. 너무 속상해서, 환불 받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산을 두 개나 넘어 왔는데 (미묘하게 왜곡된 표현) 어찌 그냥 가랴, 싶어 표를 받고 기다렸다. 갑작스런 곡목 변경에 대한 사과로 수원시향의 '환상교향곡' 녹음 CD를 주더라.

실 공연은 '영웅의 생애' -> 첼로 협주곡 순으로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에는 반대로 나와 있다. 영웅의 생애가 뒤에 연주되는 편이 프로그램 구성상으론 자연스러울 터인데, 협주곡이 두 번째 곡으로 들어간 것이 시간상의 이유 때문 아닐까 - 갑자기 엉뚱한 곡을 연주하게 된 협연자의 입장을 생각하면 -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영웅의 생애는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교향시로, 순서대로 보자면 1)영웅, 2) 영웅의 적, 3) 영웅의 반려, 4) 영웅의 싸움, 5) 영웅의 업적, 6) 영웅의 은퇴 이다. 주제가 분명하고 흐름을 읽기 쉬우며, 그 덕분에 감정적으로 동조하기 쉽다는 것은 주제음악임을 고려할 때 분명 미덕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곡이 지나치게 자아도취적이고, [웅장하기보다는] 과장스럽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취향이 아니야'란 느낌.

어쨌든 이번 공연을 통해 '영웅의 생애'의 진정한 깊이를 깨달아 음악적 경험의 폭을 넓혔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잠들어 버렸다. '돈 키호테'를 듣지 못하여 낙담한 마음에 며칠 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파트 2까지는 깨어 있었고, 3의 솔로 부분에서 잠깐 정신을 차렸으나, 파트 4와 5의 앞 부분은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깨어 보니 피날레를 시작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원시향의 슈트라우스 연주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상이 없다. c열 10번째 줄에 앉았는데, 음량이 좀 크고 불분명하게 들린 점이 불만이었다. 좀 더 뒷자리로 가서 앉을까 싶다가, 귀찮은데다 본래 정해진 자리를 뜨지 않는 성격이라 그냥 끝까지 같은 자리에서 들었다.

조금 다른 얘기로, 바이올린 솔로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서울시향의 전 악장, 신상준 님이 무척 그리워졌다. (수원시향 악장의 연주 때문은 아니다.) 요즈음은 뭐 하고 계실까. 시향이 단원을 새로 뽑고 지휘자를 바꾸어 대혁신했다는 소식이 들려도, 신상준 악장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공연을 보러 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

휴식 시간 후,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 끼워 넣는 것 치곤 꽤 무게 있는 곡을 골랐다 싶었는데, 연주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특히 묘하게 익숙한 3악장에선 즐거웠다. 연습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을 터인데 지휘자와 단원들, 협연자 모두 눈에 띄는 동요 없이 곡을 탄탄히 이끌어가, 듣고 있자니 안심이 되었다. '돈 키호테'를 못 들어 속상했던 마음도 다 풀리고 기분이 그냥 좋아졌다. 좋은 음악이 가진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나는 버섯을 싫어하지만 버섯이 첨가된 '맛있는' 요리가 나올 경우 깨끗이 먹기도 하는데, 음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는 듯 하다.

첼로 협주곡이 끝난 후, 앵콜 전에 박은성 지휘자가 입을 열었다. 본래 돈 키호테를 하기로 하고 계속 연습해 왔는데 며칠 전에 첼로 독주자만큼이나 중요한 비올라 파트 연주자가 갑작스럽게 입원하는 바람에 부득불 프로그램을 변경하게 되었다며, 대신 '돈 키호테'의 피날레 부분만이라도 듣고 가시란다. 교향악단에 대한 '운명공동체' 비유가 실감 나는 사정이었다. '돈 키호테' 같은 곡 하나 준비하기가 여간 일이 아닌데......아깝구나, 아까워. 비올리스트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송구할까. 물론 이번에 연습한 것이 있으니 언젠가는 프로그램에 넣겠지만, 매번 조금씩 다른, '바로 이 순간'의 감정선이야말로 공연의 맛이거늘.

돈 키호테 피날레까지 듣느라 귀가가 늦었다. 너무 피곤해서 집에 오는 길에 컵라면을 하나 샀으나, 먹지는 않았다. 육체적으로 대단히 무리한 하루였고 - 그 때문에 금요일에는 오전 10시 반까지 정신없이 잤다 -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좋은 공연, 노력한 연주였기에 만족했다.

댓글 1개:

  1. 저런. 많이 피곤했나보네. 나도 부산으로 이사가게되면..(내년엔 가겠지) 저런 문화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을지도^^ 잘 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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