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19일 토요일

2005년 11월 19일 토요일 : [잡기]

낮, 화실 수업을 마친 후 연필콘테와 스케치북을 사러 화방으로 갔다. 막 계단을 오르던 차에 전화가 와서 문간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는데,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서두르지도 않고 발치를 천천히 지나간다. 몸집이 내 팔뚝 길이도 안 되는 것으로 보나 어딘가 위태로운 걸음걸이를 보나 다 자란 고양이는 아니었다. 고양이는 계단을 지나 상자들 틈으로 사라졌고, 나는 전화를 끊고 실내로 들어갔다.

삼십 분 쯤 지나 밖으로 나와 보니, 고양이는 그새 다시 문 앞으로 와 몸을 돌돌 말고 웅크려 있었다. 내 양손을 모아 펼친 크기가 될까말까했다.

작년, 정확한 계절은 기억이 나질 않으나 비가 많이 왔으니 추석 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독서실로 돌아가는 길에 꼬질꼬질한 흰 개를 한 마리 보았다. 개는 청소년 회관 주차장 근처를 오가며 지나는 사람들 발치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 날 밤에는 비가 굉장히 많이 왔다. 다음 날, 식당 앞 전봇대에 잉크젯 프린터로 흑백 인쇄한 '강아지를 찾습니다' 에이포 지가 붙어 있었다. 키는 몇 센티미터 - 선 사람 무릎 아래 정도란다 - , 흰 색, 사진과 같이 생긴 강아지, 근처에서 잃어버렸으니 보호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공일육 어쩌고 저쩌고 번으로 연락 달란다. 개 이름도 있었다. 내가 본 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품종만 같으면 모두 같은 개처럼 보는 내 눈으로야, 아무리 살펴도 전날 저녁에 본 개와 같은 개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품종과 색은 같았다. 덩치도 비슷한 것 같았다. 식사 하고 독서실로 들어가는 내내, 전화를 할까 말까, 한들 도움이 될까, 같은 개이기는 했을까 고민했다. 청소년 회관 근처를 부러 살피며 천천히 걸었지만, 어제 그 개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까만 고양이를 보고 일년 전 그 개 생각이 났다. 화방 후문가는 에어컨 실외기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어 여름엔 덥고 겨울에도 답답할 만큼 훈훈한 곳이다. 어쩌면 까만 고양이는 갈 곳이 없거나 어미고양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따뜻한 바람이 좋아 게 웅크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가 많이 온 날 밤, 신림동 어귀에 사는 누군가는 지저분한 꼴이 된 자신의 반려동물에게 짜증을 내며, 흰 개를 벅벅 씻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공일육 어쩌고 저쩌고는 며칠 뒤 동네 곳곳에 붙였던 포스터를 기분 좋게 떼어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엔딩이 진심으로 믿어지지가 않아서, 나는 이불을 목끝까지 덮어쓰고 미이라처럼 가만히 누워 자정이 다 되도록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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