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15일 수요일

2004년 12월 15일 수요일

벌써 몇 년 전, 모 종합병원 암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했었다. 암병동에 장기 입원한 환자들은 힘이 없어 휠체어를 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저런 검사를 받으러 번잡한 병원 안을 다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있을 지 모르는 검사를 위해 보호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을 수도 없다. 나는 환자를 휠체어에 태우고 검사실로 모시거나, 반대로 검사를 마친 환자를 병실로 도로 모시는 일을 했다.

환자를 모셨을 때는 병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넓은 복도를 빙 둘러 천천히 걸었다. 혼자 움직일 때는 검사실에서 좀 더 가까운 곁길로 들어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사지 멀쩡한 젊은 사람으로서 엘리베이터를 타기가 불편해서이기도 했다. 지름길 중간에는 중환자실과 대기실이 있었다. 나는 그 앞을 지날 때 마다 잠시 숨을 멈췄다. 중환자실의 닫힌 문과 그 앞 대기실에 난민처럼 모여 앉은 사람들은 죽음에 반 보 가까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사람들이 있었다. 젊은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무어라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앞을 지날 때 마다 내가 타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검사를 해야 하니 환자분을 직접 모시고 가겠다고 하면, 지친 보호자들은 그 사소한 일에 무안하도록 고마워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 조차 힘들어하는 환자를 검사 전 잠시라도 쉬게 하려 긴 의자에 눕히며, 학생, 고마워요, 하는 힘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의 건강함이 부끄러웠다. 건강하세요, 힘내세요, 내가 하면서도 덧없이 들리는 인사를 건네며, 나는 나의 무력함이 부끄러웠다.

외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몇 달 전이다. 연세가 있으시니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부모님께서 별 말씀 없으시기에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처음 간 동네 내과에서는 암인 것 같으니 큰 병원에 가 보시라고 했다. 큰 병원에서는 아닐 지도 모르니 조직검사를 해 보자고 했다. 조직검사를 해 보더니 양성이라고 했다. 수술을 하고 혹을 떼어 낸 다음에 들여다 보니 암 세포가 있었다.

그 세대에 쉽게 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짊어졌던 무게는 개인에게 각별한 법이다. 어머니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엄마보다는 오래 살 거야,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외할머니를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 내가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어렸지만 지금처럼 무기력했던 어느 여름 날, 병원 냄새가 가시지 않은 소매를 걷어 붙이고 앉아 대충 씹어 넘기던 햄버거의 뭉클한 식감을 떠올린다. 헌혈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에 우리 어머니가 암이셔서 병원에 계시다 보니-라 답하던 A형 동기와, 수혈 쇼크를 겪은 후, 죽는 줄 알았어, 정말 무서웠어, 말씀하시던 나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천천히 다가올 미래와 피할 수 없는 일과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천천히 곱씹는다.

스물 둘, 나는 여전히 젊고, 여전히 건강하고, 여전히 무력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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