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0일 금요일

2009년 4월 9일 목요일 : 재회

어제 저녁에는 정말 반가운 분을 만났다.

[법정보조사와 법문장론]수업에는 매주 각계 법조인 또는 관련직역 분들을 초청하여 이런 저런 말씀을 듣는 특강이 원 플러스 원으로 딸려 있다. 평소에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인데 이번에는 어찌저찌한 사정으로 수요일에 특강이 하나 더 생겼다. 지난 주에 역시 법정보조사와 법문장론에 사은품으로 딸린 실습 강의에서 들었던 로앤비 사용법이다. 이미 한 번 배운 내용인데다 생각해 두었던 다음 일정이 있었던 터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듣긴 해야겠지, 하는 심정으로 어슬렁 어슬렁 강의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특강을 하러 오신 분이 안 모 님이셨다.

나는 고등학생 때 평일 저녁에 동네 영어회화 학원에 다녔다. 수험과는 무관한 원어민 프리토킹 반이었는데, 시간이 시간인 만큼 나 외에는 대부분 직장인들이었다. 안 모 님은 그곳에서 만났던 분으로 당시에는 파주에서 근무하는 군법무관이셨다. 우리는 평일 저녁 프리토킹 반에서 으레 그렇듯, 수업 시간에 디스커션 토픽 어쩌고 하는 책을 놓고 이야기했고 수업 후에 학생들끼리 모여 한두 번 차를 마셨다. 강사는 이름을 칼(Karl)이라 하는 이십 대 후반 입양인이었다. 그의 친부는 두집살림을 했던 남자였다. 나는 평소에는 가본 적 없는 층수가 있는 카페 겸 바에서 평소에는 카페는 커녕 학교에도 머무르지 않았을 법한 시간에 한 유부남이 한 미혼모와 한 입양인을 만들어낸 과정에 대해 들었다. 그 남자는 칼 외에도 몇 명의 생명을 만들었고, 아마 그보다 더 많은 계급을 만들었을 것이다. 칼은 캐나다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친모와 재회했다. 그는 불행하지 않다고 했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광화문 근처에 있었던 크림치즈 베이글이 맛있는 카페, 위치스 테이블에서 한국에 다시 찾아온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인 여자친구와 있었는데, 크게 싸웠는지 둘 사이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지금 기억을 되짚어 보면 한미간의 거리차이와 결혼이라는 대단히 민감한 주제로 인한 신경전이었다. 이성간에 때로 일어나는 짜증과 애정의 스파크를 감지하지 못했던 당시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칼과 대학생활과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자친구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탁자에 가계도를 그리던 칼의 손가락이 기억에 선명한 그 카페에서 나는 안 모 님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 때는 파주나 미국이나 별 차이 없이 먼 곳처럼 느껴졌는데, 어째서인지 칼과 안 모 님의 나이 차이는 꽤 크게 생각되었다. 칼을 다시 만났던 때 쯤에 안 변호사님과도 안부 메일을 주고 받았었다. 그 분이 법무관 생활을 끝내고 로앤비 일을 시작했던 때였다. 재미있으면 연락하지 말고 힘들 때면 연락하라는 어른의 호의를 감사히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팔 년이 지났다. 나는 이걸 만드신 분을 만났었지- 하고 생각하며 로앤비에서 판례를 출력하는 공부를 시작했고, 개당 70만원이라는 의자가 놓여 있으나 볕이 들지 않아 발목이 시린 대형강의실에서 그 분을 다시 만났다. 프레젠테이션 첫 화면에 뜬 안 모 님의 성함을 보고 강단에 선 얼굴을 확인했을 때는 더없이 반가웠다. 로앤비를 사용하며 그 때를 떠올리곤 했던 터라 이렇게 재회한 사실 자체에는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으나, 예전에 호감을 갖고 알았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우연이 그토록 기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나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인사는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차가워진 발가락을 꼬물거리고 박자를 맞춰 어깨도 두드리며 강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비어져 나오는 반가움과 그리움을 어색하게 눌러 씹고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하고 천천히 말을 꺼내자마자 "아, 정소연씨."라고 답하는 안 모 님을 마주하고, 어깨를 두드리고 목도 몇 번 좌우로 꺾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감이 지난 에세이도 끄집어내 몇 줄 썼던 것을 후회했다. (사실 사각지대가 없는 강의실에서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면서도, 이거 금방 반성할 것 같다고 생각 했었다.)  

안 모 님은 내게 얼굴이 거의 변하지 않았네요, 지금도 SF 쓴다든가 하는 일 하고 있어요? 홈페이지도 해요?하고 물었다. 나는 명함을 꺼내며 네, 그 때 하던 건 거의 지금도 하고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돌아오는 길에 십여년 전의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어리고 풋내나던 시절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 변해버린 자신을 씁쓸하게 돌아보게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는 아마 내가 지난 시간을 부정하지 못할 만큼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사람인데다, 아직 변했네 마네 할 만큼 거창한 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을 잘 까먹는다. 아, 그렇구나, 그 사이에 나는 부끄러워 할 것조차 없음을 부끄러워 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댓글 1개:

  1. 최근에 결혼하셨군요.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신랑되시는 분 이름을 보고 잠깐 웃었습니다. 우리 큰애 이름하고 같아서요^^

    시간이 꽤 많이 흘렀죠? 옛날에는 누군가를 만날 때, 이 사람을 5년이나 10년쯤 후에 또만날거라는 생각을 잘 못했는데, 살아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비록 학원이나 뒷풀이에서 몇번 얼굴을 본 것 밖에 없는 데 Jay씨가 기억에 뚜렷이 남는 것은 뭐랄까 고등학생이었던 Jay씨가 굉장히 똑똑하고, 잘 자랐다는 생각을 했었다고나 할까요. 여기서 잘 자랐다는 것은 예의바르다거나 곱다는 뜻이라기 보다는(그게 아니라는 건 아니고^^)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개성과 자유를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뜻이에요.

    아마도 사이트를 통해 이렇게 자신을 오픈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자신감이 뒷받침되서가 아닐까 생각해요.

    아래 로스쿨과 관련한 글에 대해 공감가는 바도 있지만, 충분히 사랑받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험 없이 온전한 의미에서 타인을 충분히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좋은 뜻을 세운다면 Jay씨가 할 수있는 일은 무척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만 않는다면요^^)

    음...어줍잖은 조언을 한 듯하네요. 혼자서도 잘해나가실텐데.

    혹시라도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하여간 반가왔어요.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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