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6일 일요일

2009년 4월 26일 일요일



소백산 천문대에서 이틀 동안 같은 방을 썼던 윤이형 님은 결혼한 지 일 년 쯤 된 신혼이었다. 동종업계 종사자 커플인 윤이형 님은 나란히 앉아서 글 쓰느냐는 질문에 실소하며, 아뇨, 글 쓸 때는 서로 집 반대편 끝과 끝으로 가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결혼 하고 처음 십 개월 동안은 글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혼인하고 한 달, 나도 글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대학원 공부가 바쁜 탓도 어느 정도는 있겠으나, 팔 년이나 학부에 적을 두고 야금야금 학교를 다녀버릇한 내가 댈 핑계는 아니다. 지난 주에는 날은 궃고 마감은 다가오거나 지나가고 있고 아무 것도 창조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감각은 괴롭고 다른 분들의 좋은 글을 읽어서 감을 살려 보자 싶어 배명훈님이나 김보영 님 등 좋아하는 작가분들의 글을 손에 닿는 대로 읽다가 역시 나도 이런 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창을 열고 새벽까지 닥치는 대로 써 보았으나 쓰면서 보아도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더욱 비참해지고 차라리 번역을 했으면 마감이라도 하나 메꾸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에 허우적거리다가 짜증을 내면서 침실에 들어가 남편을 옆으로 슬슬 밀어내고 이불을 홱 뒤집어썼다.

그리고 아침이 되니 남편이 일어나서 밥은 먹고 마저 자라고 깨운다.

삶이 이야기를 압도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을 지날 때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단지 그 안에서 살았을 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런 경험들을 바깥 세상에 뱉어낼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의 푸념으로, 분위기를 탄 티타임에서의 농담거리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동생과 나란히 누워 화제삼는 추억거리로. 그리고 그것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성 아이, 지구 입양기]를 번역할 때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나는 원고를 할 적마다 그 책을 다시 읽고 다시 울고 역자후기에 뱉어내고 싶은 말들을 수첩에 적었다. 마침내 교정지를 받아들고 역자 후기를 썼을 때 나는 약혼자가 있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담담하게 '이 책은 나의 손으로 옮겨졌으나 나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쓸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 삶은 행복한 작은 이야기들을 주워모아온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역으로, 내가 여기에서 방향을 틀고 있다고 느껴지게 만들었던 모든 경험들은 그 사이를 단번에 베는 칼날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번 경험, 이야기가 될 수 있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내 안에 흩어져 있던 다른 모든 이야기를 압도하고 있는 이 새로운 삶의 감각은 샛맑게 반짝이며 일상을 따뜻하게 데운다. 안도감, 즐거움, 기대감, 평화로움, 충만감. 고마움.

결혼 전에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나가는 경험을 통해 더 너그러워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곁에 있을 수 있는 타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부딪혀 보니 이야기가 글로 다듬어지기 전에, 아니, 이야기가 만들어지기에 앞서서 삶을 사로잡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과 그 순간을 출발점으로 하여 앞뒤로 생생하게 뻗어나가는 경험의 향연이 있었다. 결혼에만 이런 순간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삶을 덮는, 혹은 들어올리는 감각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 만은 분명하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결국 펜을 놓고 일단 지금을 크게 숨쉬어 본다.

댓글 3개:

  1. 결론은 솔로를 향한 염장질? ㅋㅋㅋ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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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고양이 - 2009/04/28 09:31
    염장으로 방문자 여러분들을 주렁주렁 낚는 성취감을 느껴보려고 헀는데 반응이 없어서 조금 좌절하고 있었다지요.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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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뭐랄까, 중반부터 제게는 좀 어려워서...;; '음 이건 산문이 아니고 시로군' 하고 읽다 말았다죠 ㅠ,.ㅠ



    리플을 보고서 다시 끝까지 읽어보니 '음 이건 염장이 주제인 시로군, 그것도 엄청난' 하고 감탄하게 되는군요. ^^ 늘 지금처럼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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