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6일 수요일

2005년 10월 26일 수요일 : 제6회 서울유럽영화제 '타임 투 리브'

홍대 앞 리치몬드 과자점에서 수현님과 만났다.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었고, 후식 삼아 케익도 두 조각 먹었다. 수현님은 녹차티라미수, 나는 몽블랑. 리치몬드 앞으로 수없이 지나다녔건만 실제로 들어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혀 상관없는 얘기지만, 지난 주 토요일엔 길에서 파는 계란빵을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서비스는 서비스랄 것도 없는 수준이었으나 어쨌든 케익은 무척 맛있었다. 좋아하는 몽블랑을 오랜만에 먹어 기뻤다.

'종일 집에 있으면서도 영화 볼 시간이 없다고 괴로워하는' 프리랜서의 고충, 완벽주의와 설렁주의, 그냥 성격, 병원, 드라마, 섹스어필, 졸리님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없이 즐거웠고, 수현님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다.

수현님과 헤어진 후, 메가박스에 가서 프랑수와 오종(François Ozon)의 2005년 작 '타임 투 리브(Le temps qui reste)'를 보았다. 이번 서울유럽영화제의 개막작이다.

서른한 살 사진작가 로망은 촬영 중에 쓰러져서 병원에 갔다가,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처지임을 알게 된다. 온 몸에 암이 전이되어 수술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항암 치료를 한다 해도 살아날 확률이 매우 희박하고, 그대로 있으면 '평균적으로' 삼 개월 정도 살 수 있다. 로망은 가망 없는 치료를 받느니 그냥 있기로 결정하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아니, 뭘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남은 시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애인과 헤어지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죽을 날이 멀지 않은 할머니를 만나러 가고, 할머니를 찾아 가는 길에 만난 불임 부부와 사랑을 나눈다. 처음의 어리둥절함은 분노가, 절망이, 슬픔이, 미련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대단히 아름답고 인상적인 영화였다. 흐느껴 우는 관객도 있었으나, 나는 ('TV는 사랑을 싣고'를 10분만 봐도 펑펑 우는 사람 답지 않게) 조금도 울지 않았다. 그냥 취한 듯이 영화관을 나와, 역시 반쯤 취한 듯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탈 때 까지만 해도 '나는 왜 영화를 보는 걸까' 같은 중요하지 않은 고민에 빠져 있었으나, 아홉 시쯤 되자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영화 생각은 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서 뭘 먹을까 한참 궁리하다, 아, 살아있다는 게 결국 이런 거구나, 하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덧붙여: 처음 '타임 투 리브'라는 제목을 보았을 땐, 시한부 삶에 대한 영화임을 알면서도 당연히 'time to live'라고 생각했었다. 한참 뒤에야 'time to leave'라는 것을 알았는데,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댓글 3개:

  1. "집에 들어가서 뭘 먹을까 한참 궁리하다, 아, 살아있다는 게 결국 이런 거구나, 하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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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 이건 저도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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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저도 time to live인 줄 알았어요.

    어쩐지 검색해도 없더라니...



    아. 영화 좋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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