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28일 월요일

2005년 2월 28일 월요일 :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제 218호)

관촉사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은진미륵은 얼굴이 커서 비례가 잘 맞지 않고 우스꽝스럽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더욱이 기강을 한창 잡던 광종 대에 세우기 시작했던 불상이 우스꽝스러울리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천 년 전의 대형 석불을 두고 '우습다'고 쉬 평하는 일은 군신간 권력싸움을 바탕으로 했던 예송논쟁을 두고 '그까짓 상복 몇 달 입고 안 입고를 두고 투닥거리고 있었다'는 지엽적인 비난을 퍼붓는 것과 같지 않을까.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광종 대에 작업을 시작하여 40여년이 걸려 완성한 국내 최대 불상이다. 높이가 대충 18m 정도로, 자연석 두 개를 허리 부분에서 이었다. 흙을 산처럼 쌓아 조금씩 허물어가며 조각하는 방식으로 세웠단다. (고인돌과 같은 제작법이다.)


(이걸 보면 미륵이 맞기는 한데)



지금은 전란을 겪으며 없어졌지만, 머리와 관 사이 석회를 바른 부분에는 본래 빛을 반사하는 장식물이 있었을 것이라 한다. 관 위에는 작은 금부처가 있었단다. 둘 다 일제시대에 도난당했다. 관의 깨어진 부분에 대한 설화를 들었는데, 대충 종합하면 살수대첩과 삼국유사 어딘가에서 읽었던 야담에 석상의 엄청난 규모에 대한 경외감을 첨가한 것 같았다. 당시에는 이 관촉사 앞에 강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때 다리에 쓰인 돌이 있다던데 찾지는 못했다.), 거란이 침입하여 예까지 내려와 물을 못 건너다가 한 스님이 강을 걸어 건너는 것을 보고 물이 얕은 줄 알고 따라 강에 뛰어들었다가 깊고 거친 물살에 휩쓸려 몇백 명만 간신히 살아 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그 때 화난 거란장수가 '이 사기꾼 땡중!'하고 스님의 목을 칼로 쳤더니, 스님은 사라지고 관이 깨어진 미륵상만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더라 한다.

관촉사가 있는 산은 그리 높지 않은 둔덕이고, 오전에 찍은 사진의 그림자로 짐작할 수 있듯이 입상은 남쪽을 보고 있다. 고층 건물도 높은 산도 없는 곳이니 처음 만들었을 때는 그 위용이 실로 대단했으리라. 지금보다 소음과 장애물이 적어 작은 소리도 널리 퍼졌을 텐데, 바람이 많이 불면 관에 달린 풍경이 정말 댕그랑 울렸을까? 그 소리는 어디까지 갔을까?

미륵보살은 현세에 구원받지 못한 중생을 위해 먼 미래에 찾아온다는 부처이지만, 이 은진미륵은 삼국시대 미륵보살상과 달리 별로 중생 구원에도 사유(思惟)에도 흥미가 없어 보인다. 큰 얼굴은 가까이 선 사람을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올려다보면......좀 무섭다.; 규모로 보나 엄한 인상으로 보나 왕명으로 만든 보살상 답다. 달리 얘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태조 왕건의 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후백제(이 논산시에는 견훤왕릉도 있다)가 흥했던 곳을 굳이 골라 대역사를 벌인 데에도 다른 뜻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호족 여러분 국왕폐하 말씀을 잘 들읍시다. 안 들으면......알지?'



크기 비교 삼아 발가락을 찍어 보았다. 옷 주름은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원형으로 파인 상처들은 6.25때 총탄을 맞은 흔적이란다.


(관촉사 석등- 보물 제 232호)

미륵 정면에 세워져 있는 이 석등 역시 꽤 크다. 높이로 보아 큰 등을 넣었으면 빛이 대충 미륵상 가슴팍에서 턱 정도에 반사되었을 듯 한데, 그럼 설마 어두운 방에서 턱 밑에 손전등 갖다 대고 켜는 것과 같은......? (농담)


(관촉사 배례석)

배례석 역시 미륵보살 정면에 있다. 즉 배례석 - 석등 - 석불이 일직선을 이루고, 배례석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불전이 있다. 관촉사에는 따로 불상이 없고, 보통 절에서 불상을 놓는 자리에 큰 창이 있어 이 창을 통해 은진미륵이 보인다. 배례석 앞에는 몹시 낡은 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미륵상에 절을 할 때 올라서는 배례석 코앞에 석탑이 있는 것이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석탑은 고려시대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즈음에 다른 곳에 있던 석탑을 옮겨 둔 것이란다.

관촉사는 역사가 오랜 절이지만 몇 번이나 불타고 새로 지어, 지금 있는 건물 역시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란다. 나는 가람 배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건물들이 (1) 새 것이고 (2)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세운 것처럼 대충 흩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리 저리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목탁 소리가 잦아들고 인기척이 잦아지자, 침입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슬그머니 절 입구로 향했다. 가람 초입에 메주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개 두 마리가 번갈아 짖었다. 나는 나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댓글 7개:

  1. 오오... 이 멋지구리한 큰얼굴! ^^ 전 사실 "우스꽝스럽다"는 표현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오히려 우습거나 귀엽게 생긴 석불, 조각상들에 엄숙하고 신비스럽기만 한 작품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라... 어떨까요. 그 말씀을 한 분의 말투에 따라 느낌이 달랐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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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 저 역시 '익살스럽다, 우습다, 희안하다' 계열을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더욱

    '통일신라 시대의 미륵불은 균형과 조화의 미가 돋보이는 수준높은 (중략) 반면 이 미륵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려시대 불상은 지방에서 만들다 보니 비례도 안 맞고 (후략)' 쯤 되니 '아무리 수험을 위한 학원 강의라고 해도 관점이 너무 수상한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P

    ....게다가 우습다는 말을 들으면 광종이 무덤에서 울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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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일제때 도난 당했다니..안타깝네요..

    삼일절이라서 그런가..;;



    사진과 글 너무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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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하! "수혐을 위한 학원강의"...였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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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고기집 아들님/ '일제 때' 이지 '일본인이'는 아니라고 합니다. ^^;

    흥미로운 글이었다니 기뻐요.

    as님/ 흐흐. 네. 그래도 보시는 분들의 오해를 막기 위해 부언하자면, 수험강의라 하여 단순하거나 편향된 내용을 배우지는 않는답니다. 오히려 통사를 굉장히 자세히 다루죠. 덕분에 답사하고 싶은 곳, 읽고 싶은 고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인물들이 잔뜩 생겨서 정말 즐거워요. (바로 이런 생각이 한국사로 인한 평균대하락의 원인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 보지만...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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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나는 나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 말 사뭇 멋지다. 니 다이어리에 답글은 처음이군.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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