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11일 금요일

2005년 2월 11일 금요일 : 고시생 잡담

나는 규칙적인 편이다. 이 규칙적이라는 말은 대개의 편견과 달리 성실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규칙적인 생활이란 부지런함보다는 습관적인 무심함에 가깝다. 무엇이든 일정하게 되풀이하다 보면 그만큼 신경 쓸 일이 줄어들기 마련이고, 그만큼 다음 일을 걱정할 필요 없이 게으름을 피우며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수험공부를 시작한 이래, 나의 습관성무심어빌리티포인트는 나날이 상승했다. 주기적으로 환경에 변화를 주면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은 내겐 먼 나라 얘기. 나는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고, 같은 시각에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은 경로를 따라 산책을 하고, 심지어 같은 시각에 화장실을 가는 지경, 아니 경지(!)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런데 몇 주 전부터 언제나 똑같은 독서실 책상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일 년 가까이 책상 왼쪽 구석에 놓아두었던 쓰레기통이었다. 열람실 밖에 쓰레기통이 있기는 하지만, 접착력이 떨어진 포스트잇, 컵에서 흘러내린 물을 닦은 휴지 따위를 버리러 매번 자리에서 일어나기란 귀찮은 일이라, 나는 티백 스물다섯 개가 들어가는 홍차 상자 상단을 잘라 책상 구석에 놓아두고 쓰레기통 대신 쓰고 있었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쓰레기가 제법 찼다 싶으면 열람실 문 밖에서 툭툭 털어 비웠다.

'쓰레기를 상자에 버린다 -> 상자가 찬다 -> 버린다'는 습관을 일단 들이고 무심해진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찬다->버린다'단계가 도통 오질 않는 것이다. 쓰레기통을 언제 비웠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잠자리에 눕다가 '그런데 내가 양치질을 했나?'하고 고민하는 것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버리고 잊었겠거니, 하고 별 생각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얼마 전에 책상 위에 멀쩡히 놓아두었던 책을 한 권 잃어버린 다음부터는 소소한 소지품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심하던 일에 갑자기 마음을 쓰려니 잘 되지가 않았다. 월요일 아침에 상큼하게 입실해서 깔끔한 쓰레기상자를 노려보며 '저걸 내가 금요일에 비우고 갔던가?'를 궁리하다 보면 문득 '어련히 비웠으니 비어 있겠지. 나도 드디어 신경과민 고시폐인이 되는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필기구도 아니고 쓰레기에 남이 손을 댈 리가 없다. 내가 버리고 잊었을 터인데, 버린 기억은 없다. 그래서 지난 주에 '찬다->버린다'를 '안 버리고 둔다. 버릴 때는 달력에 표시를 한다.'로 바꾸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래, 상자는 비어 있었다. 어제 안 비운 것이 확실했다. 달력에 봐도 표시가 없다. 누군가 비운 것이다! 이럴수가!

늘 하던 대로 헌법 책을 들여다 보다가, 누군가 내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었다-는 놀라운 깨달음이 준 충격을 주체할 수가 없어 [사물함을 잘 잠그고] 총무실로 내려갔다.

제이: "이거 정말 이상한 말인데요, 제 책상 위에 있는 쓰레기통을 요즈음 다른 사람이 비우는 것 같거든요? (=_=)"

총무님: "어라? 이상하네요. (=_=)

아, 청소하는 아주머니께서 비우셨을 거예요. 청소를 굉장히 꼼꼼히 하시거든요. 쓰레기통인 걸 보고 비우셨나봐요. 책상도 책 안 놓여 있으면 매일 닦으시니까요. 손 대지 마시라고 말씀드릴까요?"


그런 것이었습니까. OTL 나는 간신히 "아뇨, 괜찮아요. 이유를 알았으니 되었죠. 하 하 하 하" 하고 상큼하게 웃은 다음 자리로 돌아와 풀썩 주저앉았다. 이로서 쓰레기상자의 미스테리는 풀렸으니 다행[이랄까], 인생은 해피엔딩, 수험은 투비컨티뉴드.

댓글 2개:

  1. :D 해피엔딩

    시험도 그렇게 잘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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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고맙습니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범인을.....아, 이게 아닌가......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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