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17일 월요일

2005년 1월 17일 월요일 : 고시생 잡담

고시계 용어 중에 '단권화'라는 것이 있다. 분량이 방대하고 법과목이 많은 시험 특성상, 책 한 두 권만 가지고는 필요한 학설이며 판례, 이론을 모두 찾아보기 쉽게 정리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시생들은 기본서 한 권을 정한 다음, 그 책에 다른 참고서, 문제지, 학원 수업에서 배운 중요한 내용을 첨가하여 시험장에 가지고 갈 자신의 책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단권화이다.

사람 사는 동네 어디든 마찬가지듯이, 이곳에서도 도난사고가 꽤 자주 일어난다. 카세트, 강의테입, 지갑, 책.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일이 바로 책 도난이라 할 수 있다. 물건은 사면 된다. 하지만 정리한 책은 돌아오지 않는다. 책 값이 문제가 아니다.

처음 내 자리에 들어가 코트를 벗어 걸치고 책상 위에 따뜻한 물컵을 올려 놓을 때 까지만 해도 나는 무엇이 없어졌는지 몰랐다. 책상 어딘가가 헐겁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공부를 시작하려고 자리에 앉아 독서대를 보았을때야, 금요일 밤에 급히 귀가하느라 펼쳐 놓은 채 두고 나갔던 헌법 기본서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다른 물건은 모두 그대로였다. 심지어 신판 한국사 책조차 제 자리에 얌전히 있었다. 내가 뭔가 착각했나 싶어 사물함을 열고 뒤져 보았다. 사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고 넘기고 덮고 챙겨넣는 것인데, 가장 중요한 헌법 기본서를 다른 곳에 두고 잊었을 리가 없다. 시험까지는 이제 고작 한 달 남짓. 일 년 동안 정리한 책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눈 앞이 아득해졌다. 새 판례를 첨가하고 틀린 객관식 문제의 지문을 정리하고 밑줄을 쳐서 천이백 페이지짜리 책을 겨우 손에 익혔다. 이럴 일이 아닌데 싶으면서도 순간 눈물이 났다.

좌후방이 벽인 제일 구석 자리라 설마 했다. 사물함에 책을 넣어두지 않은 내게 이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시험을 코앞에 두고 다른 사람이 정리한 기본서를 쏙 빼간 쪽에 있지만. 어이가 없다. 세상에, 헌법이란 말이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이렇게 쉽게 가져가는 사람이 헌법 공부를 한다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순진하기 때문일까. 형법 책을 도난당했다면 정말 기분 희한했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순간 웃음이 터진다.

일단 심호흡을 크게 하고, 서점에 나가 똑같은 책을 새로 사 왔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새 책이 낯설다. 뭐, 어쩌겠어. 껄껄.

댓글 12개:

  1. 어찌 그런일이.. -_-

    기운 잃지 마시길 기원합니다, 으ㅤㅆㅑ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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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껄껄. 이 험한 세상. 호기롭게 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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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헉. 그런 일이... =_=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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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건... 뭐라고 위로를 해야할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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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세상에; 따뜻한 초콜렛 마시고 힘내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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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주성치님이 힘을 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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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어이쿠, 모두들 고맙습니다. 금방 부활!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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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부활 가지고 안되지 '쿵후허슬'처럼 고난뒤에 막강한 내공증가까지 따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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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혹시 주위에서 시기당하는 건......?

    저도 학부 때 프로젝트 참고 문헌을 빌렸다가 비슷한 경우를 당했었던... ┐(  ̄ー ̄)┌

    우리 과에서 나의 재능을 시기하는 녀석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도서관에 분실된 책 값으로 생돈 처부으며 속으로 피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있군요..(아아, 생활비가..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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