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6일 토요일

2004년 11월 6일 토요일 : 천국의 웃음 - 에른스트 루비치 회고전 '미소짓는 중위'

오전에 독감 예방주사를 맞은 후 홍대 별다방에서 아스님과 접선, 따뜻한 커피와 티라미수를 먹으며 AJWB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뻥)

출처: 서울아트시네마


아스님과 헤어진 다음에는 서울아트시네마에 가서 에른스트 루비치의 1931년 작, '미소짓는 중위'를 보았다. 한참 전에 예매를 해 놓고 따로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 보지 못했던 터라 (그래, 언제나처럼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에 헐레벌떡 뛰어들어갔다.) 주인공들이 영어를 써서 깜짝 놀랐다.; 귀가길에 팜플렛을 읽어 보니 루비치가 헐리우드에서 작업한 영화란다.

전후(戰後), 여자와 뒹구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던 오스트리아 군대의 중위 니키는 바이올린 연주자 프란지와 사랑에 빠진다. 오스트리아 왕과 사촌지간인 플라우젠트룸(never forget the H!)의 왕이 딸 안나와 함께 비엔나를 방문한다. 니키는 왕의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 서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바로 맞은 편 구경꾼 틈에 프란지가 서서 계속 손을 흔들고 웃자 무표정하고 경건하게 서 있지 못하고 그만 씨익 웃으며 윙크까지 날려버린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순간을 딱 맞춰 지나가던, 왕의 마차에 탄 공주 안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다음 날, "모욕당한 왕족"이니, "중위가 공주를 비웃다"같은 헤드라인이 신문을 장식하고......

굉장히 즐겁게 보았다. 이런 영화라면 하루에 두세 편도 볼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부담이 없어 놀라기도 했다. 내용 자체가 가볍고 경쾌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루비치의 영화에 내재한 탁월한 '시간의 속도'에 그 공을 돌리는 것이 옳을 듯 하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러나 한편 지루하지 않을 만큼 시간을 잡아 늘이거나 잘라내어 이야기 진행에 놀라운 탄력을 부여했다. 여기에 톡톡 튀는 재치와 은근한 성적 유머가 더해지니 이것 정말 천하일품이로세. 특히 오스트리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플라우젠트룸 왕과 안나가 주고 받는 대화, 신혼 초야를 치를 방에서 베개를 정리하는 장면('어? 이거 정말 성인형 유머 아닌가?'), '밖으로 나도는 남편'에 대한 안나와 왕의 대거리 같은 부분에서는 낄낄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엔딩이 지나치게 구식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실제로 70년 전 영화이니 굳이 박하게 말할 부분은 아니겠다. 중심이 되는 인간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영화는, 언제 만들어진 것이든 인상적인 힘을 갖는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사람 이야기니까, 결국은.

시네마테크 11월호에 실린 배창호 감독 인터뷰에서 특히 공감한 단락:
예술의 정확성은 본질적인 것에서 출발하거든요. 본질적인 정확성이 중요하죠. 예전 영화들은 사운드가 이상하고, 연출이 이상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본질적인 정확성이 있었어요. 본질적인 정확성이란 인간을 바라보는 눈, 인간성 이런 것이죠. 그런 면에서 존 포드 영화가 낡았다지만, 그럼에도 향기가 있어요. 본질적인 인간을 다루는 면이 있기 때문인 거죠. 본질적인 정확성은 지금 사라지고, 현상적인 정확성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중략...) 왜 저 감독은 부감을 사용했는지, 왜 공간배치를 저렇게 했는지, 그런 질문들을 안 합니다. 워낙 장비 자체가 받아들이는 능력이 뛰어나니까요. 8미리 캠코더로 아무렇게나 찍어도 영화가 되는 거예요. 기계적인 재현력이 있으니까. 거칠지만 장면을 자르지 않아도 한 편의 영화가 되어 버리고. 그러니 왜 커트가 나뉘어야 하는지, 왜 부감을 써야 하는지, 이러한 것에 대한 고민이 없어요. 기계적인 힘에 소재적인 아이디어만 더해지면 그냥 한 편의 영화가 돼버리는 거예요. 영상언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는 거죠. (...후략...)

반드시 옛 영화는 본질적인 정확성을 가졌지만 요즘 영화는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고, 기계적인 힘과 소재적인 아이디어만으로 만든 영화가 꼭 부족하다는 법도 없지만, 영화언어와 본질적 정확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시대와 상관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댓글 3개:

  1. 그런 면에서 구로자와 아키라를 존경합니다. 촌스러운 연출이지만 정확하게 짚어내는 게 있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감독 같아요. (액션 장면 연출에서 느껴지는 박력은 지금봐도 촌스럽지 않으므로 예외입니다만;) 어쩌면 그래서 구로자와 아키라가 세익스피어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들이 다 훌륭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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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독감주사, 혹시 춘추관에서 맞으신건가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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