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18일 수요일

2006년 1월 18일 수요일 : [잡기] 룸펜형 인간

무료하다.

마산 살 적에, 나는 늘 서울서 살고 싶었다. 서울 가서 공부 하고 싶다고 운 적도 있을 정도다. 하도 서울 타령을 해 대니 부모님께서 정 그러면 할아버지 댁에 혼자 가서 살래, 하고 진지하게 말씀하시기도 했었다. (당시 나는 처음에는 그러마고 했다가, 일 주일 정도 고민한 다음에 아직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게 낫겠다는 식으로 답했단다.)

국가 경제난과 그와 관련된 가정환경의 변화에 따라 일산에 살게 되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힘든 일도 있긴 했지만, 더 큰 도시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정말 좋았다. 차라리 서울로 전학을 할지언정 마산에 도로 내려가지는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며 버텼다. 이렇게 한 이 년 행복하게 살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또 더 큰 도시에 살고 싶었다. 이번에는 유학이 가고 싶었다. 속이 상해서 울기도 했다. -_-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 더 많이 보고 싶었다. 쾨니히스베르크같은 구석에서 육십 년을 살아도 할 수 있는 게 공부라지만, 소화되지 못한 열망이 식도까지 차 있는 게걸스런 아이의 머리에 그런 말이 제대로 들어갈 리 없다. 하지만 유학만은, 욕심을 낸다고 될 일이 아닌 줄도 알았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생활은 행복하고 즐거웠다. 새로운 것이 잔뜩 있었다. 배울 것도 읽을 것도 볼 것도 먹을 것도 정말 많았다. 게다가 내 손으로 돈도 벌 수 있었다! 한 이 년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유학 생각도 안 했다.)

또 울 때 쯤 되어서 고시공부와 번역을 거의 동시에 시작했다. 행복하고 즐거웠다. 새로운 것이 잔뜩 있었다. 새로운 사고의 틀이 있고 새로운 시험이 있고 새로운 지식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또 울고 싶다. 이제 또 다른 걸 배우고 싶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항상 이런 식으로 살았다. 더 알고 싶다고 징징대고 더 갖고 싶다고 떼를 썼다. 더 이해하고 싶다고 억지를 부리고 더 보고 싶다고 눈을 치떴다. 현실적인 문제에 눈을 감고 지난 생활에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어이없을 만치 강렬한 허기를 느끼며 얄팍한 책장이나 뒤적였다. (그래. 두꺼운 책장을 넘길 재주도 없다.) 대체 내가 뭘 이렇게 알고 싶어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놀라울 만큼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것도 근원이 같은 병통이 아닐까 싶다. 지난 여름에는 칠 년이나 살았던 마산에 갔었다. 중요한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아무리 성정이 건조해도 실제로 가서 그 땅을 밟으면 뭔가 다른 감상이 생기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버스 노선을 대강 짐작할 수 있어서 편했지만, 그 뿐이었다. 다른 중소도시를 갔을 때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사오천 번 오갔던 길을 지나며 감상적이 되어 보려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허탈했다.

며칠 전에는 아침식사를 하다가 결혼 얘기를 꺼냈다. "결혼은 하고 싶은데, 결혼한 다음에 빨래 하고 공과금 챙기고 이런 일상잡일 할 생각 하니까 엄두가 안 나요." 내 말에 아우님이 직격타를 날렸다. "그렇겠다. 언니 지금은 아무 일도 안 하잖아." 너무 맞는 말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지식인은 어림없고 딜레당트라기에도 민망한 그냥 룸펜이다. 생존능력도 없고 생활력도 없다. 영어사전을 뒤지며 타이핑 몇 줄 쳐 놓고 이걸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한다. (어떻게 안 되고 있다.)

일전에 친구 모양이 스폰서 두고 공부 하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고 했다. 이 친구 모양은 직장인이기라도 하다. 모양의 말에 공감하는 나는, 아아, 그냥 룸펜형 인간이다.

댓글 4개:

  1. 제이님이 열심히 하려고 하면 스폰서까지는 못되어도 맛난거 사줄 사람은 잔뜩 있으니(정말?) 힘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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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내친 김에 형법과 민법에까지 발을 들여놓으시면 분명 뉴월드가 펼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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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재벌 3세와 결혼하는 것도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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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서늘님/ 헤헤. (__)

    아란양/ 그 생각도 해 봤다네. (- _)

    강명님/ 부록이 따라와서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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