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15일 목요일

2006년 6월 14일 수요일 : 선택과 합리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몇 년 전, 일리노이대의 다니엘 시몬스 박사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 이 현상을 명백히 보인 바 있다. 실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피실험자들에게 농구 경기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 주고, 패스 수를 세라고 했다. 그 경기 비디오 중간 즈음에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이 천천히 등장해서 9초 동안 경기 중인 선수들 사이를 누비고 카메라를 보고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비디오가 끝난 후, 중간에 나왔던 생뚱맞은 고릴라를 봤느냐는 질문에 피실험자의 절반 정도가 '그런 것 본 적 없다'고 답했고, 일부는 비디오를 처음부터 다시 보여주자 아까 내가 본 테이프와 다른 것 아니냐며 끝까지 믿지 않았다.

이 현상을 '변화맹(Change Blindness)'라고 한다. 시몬스 박사는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나 더 했었다. 피실험자에게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게 시킨 후, 길을 설명하는 사람과 피실험자 사이에 문짝을 든 일꾼이 지나가게 하고, 그 사이에 설명자를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으로 바꿨다. 생김새도 다르고 옷차림도 달랐다. 그러나 자신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그새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사람도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작년 가을, Science 지에 변화맹 현상에서 출발한 흥미로운 실험 결과가 실렸다. 스웨덴에서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요한슨과 홀 박사의 공동 연구였다. 피실험자들에게 인물 사진을 두 장씩 보여 주며 둘 중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라고 한 후, 골랐던 사진을 다시 보여 주며 그 사진을 왜 골랐는지 물었다. 그러나 사실 열 장 중 세 장 정도는 피실험자가 고르지 않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덮었다가 다시 보이는 사이에 손장난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피실험자 중 80%이상이 그 사진이 자기가 선택하지 않았던 사진임을 눈치채지 못하며 그 사진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지 설명했다. 골랐던 사진과 아닌 사진의 인물이 전혀 다르게 생긴 경우에도 확률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사진을 보여 준 다음 아까 고른 사진이 이 사람 맞는지 충분히 생각해 보라고 해도, 2/3 정도가 자기 마음에 드는 얼굴은 확실히 이 쪽이라고 했다.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선택맹(Choice Blindness)'이라고 이름 붙였다.

변화맹 현상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그리고 기억에서 원하는 정보를 어떻게 취사 선택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사고 장면을 동시에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경우, 같은 경험에 대해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 한 사람에게는 더없이 중요했던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이 되는 경우 등을 인지의 본래적 특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경과학, 화학, 뇌의학, 현상학 등 유관 분야의 연구와 통합된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여러가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왜 나와 너의 생각이 다른지를 아세틸콜린(....너무 거슬러갔나) 에서부터 설명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한슨과 홀 박사의 연구 논문은 사이언스 지에 실려 있고(작년 10월호인가?), 구글링을 하면 실험에 사용된 사진과 자세한 결과 수치가 담긴 PDF 파일 버전도 나온다.

후속 연구를 계속 기다렸는데, 반 년이 지나도록 이쪽 팀에서나 다른 팀에서나 별달리 발표되는 것이 없는 듯 해 잊기 전에 써 둔다. (사실 내 요즈음 관심사는 선택맹이 아니라 쿠퍼카이퍼 벨트(Kuiper Belt)다.)

댓글 3개:

  1. 위키피디아 발음은 카이퍼 벨트 쯤 되나봐요.

    http://en.wikipedia.org/wiki/Kuiper_be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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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뿔싸로군요. 우리나라에서의 공식 용어를 몰라서 검색해 봤더니 첫 줄에 나오는 게 쿠퍼벨트였거든요. 말씀 듣고 다시 찾아보니 쿠퍼대, 카이퍼벨트, 쿠이퍼;벨트 등 여러 가지 나오네요. (한 마디로 기준없음...) 원 발음이 카이퍼면 서서히 카이퍼로 통일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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