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6일 일요일

2008년 4월 6일 일요일 : 조화

겨울 바람이 한창 매섭던 연초의 일이다. 주말에 러브리홈에 갔더니 베란다에 처음 보는 선명한 자주색 호접란 화분이 있다. 마침 근처에 있던 동생에게 "어? 저 화분, 새로 생긴 거지? 예쁘네." 라고 무심히 말하자, 동생이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한다.

"아빠가 사오셨는데, 저거 조화야."

우리집에서 베란다에 화분을 갖다 놓을 사람이라면 어머니 정도이다. 새로 생기는 화분도 거의가 어머니에게 우리가 선물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싫어하시는 편이다.)

동생이 얘기하길,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로 줄 요량으로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이다 하여 저 화분을 덜컥 사 오셨단다. 마지막까지 조화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아버지는 난의 꽃대가 부러질까봐 화분을 품에 안고 차를 몰아 돌아왔다. 물론 어머니는 보자마자 가짜 꽃임을 알아보았다.

"으아, 그거 좀......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 그게, 아빠는 엄마 말 듣고셔야 아셨거든. 그런데 엄마가 받고는 바로, 겨울이라서 화분이 다 시들어 베란다가 썰렁한데, 색이 환한 게 들어오니 생기가 돈다고 하셨어. 그래서 나도 자주색이 저기 저거랑 어울린다고 옆에서 그랬어."

나는 꽃 좋아하는 어머니, 그런 아내와 사반세기를 함께 살고서도 호접란의 가격도 무게도 감촉도 알아보지 못한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마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상인에게 망가지지 않게 잘 싸 달라고 두 번이나 당부하여 준비한 조화를 조심스레 들고 귀가하는 남자와, 턱없이 가벼운 화분을 받아들고 기운이 난다고 대답하는 여자를 상상한다.

그리고 나와 내가 아닌 사람 사이의 까마득한 진공을 노력으로 메워나가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면, 그것은 바로 광합성도 하지 않으면서 겨울 내내 거실에서 한눈에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자주색 꽃잎을 반짝였던 호접란이 놓여 있던, 베란다 타일 한 장 만한 공간을 쌓아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댓글 4개:

  1. 살짝, 울먹 했습니다. 개인적인 상황과 겹쳐져서, 무언가 절실하게 와닿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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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옛날에 하춘화씨가 부른 노래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제목이 자신없음)가 생각납니다. 부부는 서로 격려하며 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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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부러워요, 부러워! 정말로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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