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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7일 토요일

2007년 3월 17일 토요일 : 빔 밴더스 특별전 - 파리, 텍사스(Paris, Texas) /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

오늘은 스폰지하우스의 [빔 밴더스 특별전] 프로그램으로 그의 84년 작 [파리, 텍사스(Paris, Texas | color | 148)]와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 | 1987 | B&W, color | 128)]를 보는 날이었다.

날씨가 좋기에 홍대 앞 카카오 봄(Cacao Boom)에 가서 비상식량으로 바크초콜릿을 사고 - 3월 말까지 스트로베리 페어를 한다더라. 정말 맛있어 보이는 딸기디핑초콜릿, 산딸기와 블루베리 초콜릿 등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싫어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기사님이 찬양방송을 커다랗게 틀어 놓아서 30분 동안 계속 찬송가를 듣느라 무척 괴로웠다. 중간 중간 DJ의 장중한 코멘트도 있었는데, 내가 내릴 때쯤 "믿음 없는 자와 마지막으로 교제한 것은 언제입니까? (중략) 믿음 없는 자에게 마지막으로 기쁨의 말씀을 전한 것은 언제입니까?" 라는 마지막 인사가 나왔다.

......범인은 너냐! -_-

버스에서 내리니 왠지 허유마냥 어딘가 씻고 싶어졌다. 뎀셀에 들어가 손을 씻고 아이스 셰이킹 에스프레소를 마신 후, 다섯 시가 되기 조금 전에 스폰지하우스로 갔다. 그런데 앞 프로그램인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GV 일정이 지연되어 [파리, 텍사스]의 상영도 덩달아 밀려, 20분이 지나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대신 원래 GV가 없는 [파리, 텍사스] 상영 전에 감독님이 잠시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입장을 하려다 보니 아뿔싸, 감독과의 대화가 있는데 필기구를 전혀 준비하지 않고 덜렁 왔잖아! 잠깐 좌절했으나 아우님에게서 빌린 녹음기능 있는 MP3P가 가방에 들어 있었던 것이 떠올라 다행히 GV를 모두 녹음할 수 있었다.

아, 지금 생각났는데, MP3P가 있었으니 버스에서도 꾸역꾸역 괴로워하지 말고 그냥 [Doctor Who]를 복습했으면 되었네.;

여하튼 그래서 [파리, 텍사스] 상영 전에 잠깐 감독님 말씀을 들었다. 아주 잠깐이라 영화에 대해 들은 다음, 감독님이 질문을 딱 하나만 받겠다고 하셨다.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고 감독님이 한 사람을 지명했는데, 그 사람의 질문이 "독일 사람이시죠?" 였다.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가 상영관을 메웠다. 나는 그나마 [베를린 천사의 시] GV를 기다리고 있었고, 별달리 질문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 괜찮았지만, 마음 속에 꼭 하고 싶은 질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정말 허탈했겠더라. 사실상 무의미한 질문이라 통역인이 알면서 물으셨냐고 확인하자, 독일어로 말하는 것이 들어 보고 싶어서 그랬단다. 그 말을 들으니 저 질문이 처음만큼 황당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77년 이후 30년 만에 한국에 온 좋아하는 감독에게서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Ich heisse Wim Wenders....'를 듣고 돌아간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파리, 텍사스]는 처음 보는 영화였다. 제목과 줄거리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이 여럿 있었고, 영화를 보면서도 초반과 중간 중간에 너무 명백하게 '본 적 있는' 장면이 나와서 헷갈렸으나, 뒤로 가니 첫 관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봤다면 잊었을 리 없는 영화였다. (범인은 EBS의 뉴저먼시네마 프로그램이었던 듯.)

전반적인 상영 지연으로 인해 [파리, 텍사스] 크레딧이 끝나자마자 전력으로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러 들어갔다. 이번 상영은 매진이었단다. 스크린으로는 재작년 유럽영화제 이후 두 번째였다. 몇 번을 봐도 너무나 훌륭하다. 그 공간감과 고양감, '본다'는 행위 자체의 존재감,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는 느낌-볼 때마다 새로이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나는 도입부와 도서관 장면(아찔하다), 콜롬보 형사가 나오는 부분, 인간이 된 천사가 처음 세상을 경험하는 장면, 거의 끝에서 남은 천사가 닉 케이브 공연장의 벽에 기대 서 있을 때의 그림자 움직임을 특히 좋아한다. 이 영화의 시점샷도 특기할 만 한데, 역시나 감독과의 대화에서도 이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감독이 컬러 장면들을 자세히 보면 실수가 있다고 해서 놀랐다. 완벽해 보였는데!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그 이야기 자체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언제이고 어디이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순간부터 뭔가, 내 인생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로드무비'라고들 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늘 담겨 있는 그 느낌이다. (출생, 졸업, 결혼, 부모의 사망 같은) 명백한 분기점에서 시작을 말하기란 쉽다. 허나 이미 계속되어온 날것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살아 있기 때문에 몇 번이고 '시작' 할 수 있는 순간들을 짚어내고, 그 시작이 필요로 하는 끝을 말하는 동시에 삶의 존재감을 고양시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리, 텍사스] 역시 그런 영화였다. 이미 흘러온 삶 한복판에서 말하는 헤어짐과 만남, 끝과 시작의 이야기.

감독은 [파리, 텍사스] 상영 전 짧은 시간에 그 영화가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슬픈 사랑이야기이고 그 영화를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부럽다고도 했다. 스크린에서 제대로 볼 기회를 얻어서 정말 기뻤다.

[베를린 천사의 시] 질문시간에 나왔던 얘기 중에 놀라웠던 점은, 그 영화에 대본(script)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페터 한드케가 참여하기도 했으니, 나는 당연히 철저한 시나리오 작업이 있었을 줄 알았는데, 사실 그냥 아이디어와 찍고 싶은 장소들만 생각한 상태에서 매일 촬영을 하고 그날 밤에 다음 날 무엇을 찍을지 조감독과 상의하며 진행했었단다.

콜롬보 형사도 처음부터 출연이 정해져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저렇게 즉흥적으로 이주일 쯤 잠 못 자며 찍다보니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단다. [베를린 천사의 시] 주인공들은 천사인데, 그렇다 보니 계속 지나치게 진지하기만 해서 - 그게 직업이니까! - 재밌고 생동감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누구나 알아보는 인물을 전직 천사로 등장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누구나 알아볼 만한 사람이라면 운동선수나 정치인 정도가 있을 터인데, '정치인이 전직 천사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테고' 그렇다면, 미국인 영화배우가 가장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터라 하여 여차저차 콜롬보 형사가 나왔다.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ueber Berlin)]이라는 원제가 영어로는 [Wings of Desire]가 된 사연도 재미있었다. 저 제목이 독일어로는 운이 딱 맞는데, 프랑스어나 영어로 직역하면 어감이 엉망진창이었단다. 'The Sky of Berlin'이라고 하면 전쟁 영화나 일기예보 같으니까. 결국 계속 제목을 정하지 못한 채로 홍보를 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기가 와서 프랑스인 제작자가 독촉전화를 했을 때 문득 [Wings of Desire]라는 말이 떠올라 농담으로 얘기했는데, 그만 그렇게 결정되었단다. 우리말 제목인 [베를린 천사의 시]는 일본 개봉시의 제목을 직역한 것이라 한다.

다섯 시간 이상 초콜릿만 몇 조각 먹으면서 영화관에 계속 앉아 있었더니 몹시 피곤했지만(그리고 집에 와서 콘스프 등 잡다한 먹을거리를 대충 먹었더니 일요일 오전에 배가 아파 고생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정말 행복하고 두근두근한 하루였다. [빔 밴더스 특별전]은 종로 3가에서 3월 28일까지 한다.

2007년 3월 4일 일요일

2007년 3월 4일 일요일 : 여자를 유혹하는 요령

정오에 오랜만에 전션과 만났다. 전션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뎀셀에서 조각케이크와 커피를 샀다. 오랜만에 만나 더없이 반가웠다. 여름이 오기 전에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세 시쯤 먼저 일어나 -일이 바쁜 전션은 일요일인데도 작업거리가 있다며 남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리처드 레스터(Richard Lester) 감독의 1965년 작 [여자를 유혹하는 요령(The Knack...and How to Get it, 85min, 영국, B&W)]을 보았다.  

혹시라도 유용한 팁을 얻을 수 있을까 조금 (정말 아주 조금!) 기대했었는데, 영화는 [여자를 유혹하는 요령]보다는 [미친 60년대를 얼빠진 청춘답게 살아가는 요령]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이 좋았고, 침대를 이용한 재기와 중간중간 등장한 자막도 재미있었다. 아, YWCA도! 하지만 뒤로 갈수록 너무 '프리'해져서 - 이 영화는 '영국 프리시네마 특별전' 프로그램이다 - 나중에는 조금 감당하기 힘들었다. 참, 그리고 시네마테크의 영화 소개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나흘동안 영화를 세 편 봤는데, 그 중에 가장 현실적인 작품이 마술용 중국 상자 속에서 죽은 기자가 물질화하는 [스쿠프]였다.; 균형감각을 맞추기 위해 2일에 보던 [Doctor Who] 에피소드 [Rise of the Cyberman](현대 런던 상공에 비행선, 죽었던 아버지가 사업가, 모두들 귀에 꽂은 이어피스earpiece로 정보를 다운로드, 사이보그....)를 일단 통과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는 195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The Idiot's Lantern]를 보기로 마음 먹었다. '식민지'가 여전히 존재하고, 흑백 텔레비전을 들여 놓는 집들이 생겨나며,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 하던 할머니가 "그거 보다간 바보가 된다"며 잔소리 하고, 텔레비전 안테나를 통해 외계인들의 전파가 사람들을 공격(?)하고, 당한 사람들은 뇌가 없어지고 이목구비가 사라지고, 얼굴이 살색 원판이 된 사람들이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창고에 보관되는 역사물이었......어라라? 

2007년 3월 3일 토요일

2007년 3월 3일 토요일 : 수면의 과학


압구정 스폰지하우스에서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5년 작 [수면의 과학]을 보았다. [이터널 선샤인]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때문에 유럽영화제 상영작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볼 생각이었으나, 유럽영화제 예매전쟁에서 처참하게 실패한 이후 줄곧 기회가 없었다. 이미 상영이 끝났을 줄 알았는데, 빔 밴더스 특별전 때문에 들어간 스폰지하우스 홈페이지에서 아직 상영목록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얼씨구나 했다.

사실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영화를 전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이 '영화를 못 봐서 몸이 아플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관 뿐 아니라 공연장에도 전혀 못 갔고 지인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기 떄문에 상태가 악화되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2월 중순에는 영화가 보고 싶어서 잠을 못 들기까지 했다. 그새 [Doctor Who] 에피소드는 두어 편 봤는데, 재미있었지만 영화적인 갈증을 해소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더라.  

[수면의 과학]은 아버지가 죽은 후, (이혼했던) 어머니의 부름으로 주인공 스테판이 프랑스에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머니가 소개해 준 달력 회사에 각 달의 세계적 재난을 소재로 한 달력 그림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가 보지만, 실제로 맡은 일은 누드 달력의 (누드 사진 편집도 아니고) 상단에 홍보 로고를 집어 넣는 지겨운 단순작업이다. 중략하고 옆집 스테파니를 좋아하게 되지만 꿈과 현실을 혼동하여 자꾸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 철없는 스테판을 이해하기란 스테파니에게 너무 어렵다.

줄거리보다도,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스테판의 몽상을 영상화한 장면들 자체가 즐거웠다. 휴지 속통으로 만들어진 기차와 골판지 차, 셀로판이 펄럭거리는 바다, 가벼운 솜 구름과 폭신폭신한 타이프라이터며 전화기 등 상품화된다면 사고 싶은(...) 아이템이 많았다. 스테판은 굉장히 유치하고 철없는, 겉만 어른이지 속은 딱 열네 살 사내아이같은 인물이었다. 짜증스러울 수 있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살려 낸 주연 배우의 역할 해석에 감탄했다. 정말 조금만 어긋났으면 "뭐 저런....." 하면서 영화관을 나섰으리라.

[이터널 선샤인] 보다 '이야기'로서의 밀도나 감성은 많이 떨어지는 영화였다. 그럼에도 웃으면서 재미있게 보았고, 이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은 들지 않지만 공드리 감독의 다음 작품에는 여전히 조금 기대하고 있다.(하지만 다음 작도 이 정도라면 생각을 달리하게 될 듯.) 영화관을 나서고 나서도 한참 몽롱한 기분이었다. 걷다 말고 쎄씨 어쩌고 하는, 벌써 상호를 잊어버린 와플 전문점에 충동적으로 들어간 것도 영화 때문이었다 싶다. 상당히 선곡을 잘 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샛노란 천막에 하늘색 나무문으로 된 곳이었다. 맛과 가격은 (흠잡을 데 없지만 미묘하게 비효율적인 점이) 딱 그 동네 다웠다.

덧: 명함을 가져 왔었군. 와플집 상호는 'Ceci Cela'. 케이크 집 가루(Garu) 근처에 있다.

2006년 11월 18일 토요일

2006년 11월 18일 토요일 : 자크 베케르 특별전 - 앙트완과 앙트와넷

시네마테크에서 자크 베케르 (Jacques Becker) 감독의 1947년 작, [앙트완과 앙트와넷(Antoine et Antoinette, 78minㅣB&W)]을 보았다.

2006년 10월 3일 화요일

2006년 10월 3일 화요일 : 우회

용진군과 압구정 라리에또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랫동안 못 간 터라 라리에또의 파스타를 꽤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어제 아우님과 어머니가 가서 맛있게 먹고 왔다고 하기에 나도-하고, 본래 종로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변경, 압구정으로 갔다.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루꼴라 스파게티를 냠냠 먹고 현대백화점에 가서 용진군이 선물 고르는 것을 구경했다. 현대백화점 와인샵에 갔는데, 소뮬리에 박모님이 용진군의 표현을 따르자면 '[신의 물방울]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매우 인상적인 분이었다. 하지만 선물은 아루의 티라미수로 결정.

현대백화점 지하에 있는 카페 자작나무에서 용진군이 가져온 다크 초콜릿을 곁들여 더치 커피 (Dutch Coffee)를 한 잔 마시고 헤어져, 나는 서울아트시네마에 가서 에드가 울머 회고전 [우회(Detour 1945ㅣ미국ㅣ69minㅣB&W)]를 봤다. 기대에 부응하는 멋진 영화로, sabbath님이 말씀하신 살인 후 시선을 따라 가는 카메라 처리는 보다가 무릎을 칠 만큼 훌륭했다. 그리고 베라 역을 맡은 배우가 정말로 무서워서, 이 여자가 나온 다음부터 영화가 심리 스릴러에서 공포물로 장르전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베라가 내뿜는 존재감은 섬뜩한 숙명의 존재감이나 어떤 계기로 서서히 끌려나오는, 인간에게 내재된 범죄에 대한 불가피한 매혹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10월 25일부터 10월 29일까지 메가박스에서 제 7회 유럽영화제(http://meff.co.kr) 가 열린다. 서울영화제에서 보지 못했던 주요 상영작이 포함되어 있고, 그 외에도 꼭 볼 만 하다 싶은 영화가 많이 있는데 행사 기간이 워낙 짧은데다 중간고사와 겹치기 때문에 실제로 몇 편이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주목하고 있는 영화들은:

1. [코미디 오브 파워(Comedy of Power)] 서울영화제에서 놓쳤던 영화.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2006년 작이다. 공금횡령 사건을 조사하게 된 여판사가 권력의 복잡한 이면을 마주하면서 느끼는 갈등, 사법체계의 문제점, 유혹과 현실 등을 풍자적으로 다룬 작품이라 한다.

2. [수면의 과학 (The Science of Sleep)] 미셀 공드리 감독의 2006년 작. [이터널 선샤인]을 대단히 인상깊게 봤던 터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이다. 수업이 없는 날 상영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번 유럽영화제 제1의 기대작으로, 제목에서부터 포스가 느껴지는 로맨틱 코미디.

3. [퀸즈 (Queens)] 마뉴엘 고메즈 페레이라 감독의 2005년 작. 스페인의 첫 게이 합동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어머니 다섯 명을 통해 '편견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대사와 유쾌한 이야기, 어머니와 귀여운 아들들이 보여주는 사랑과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준단다. 혹할 수 밖에 없는 작품 설명이로세.
유럽 영화를 본다고 해도 사실 프랑스/독일, 기껏 더해봐야 영국과 이탈리아 영화 정도밖에 보지 않았던 터라, 경험의 폭을 넓힌다는 의미에서도 가능한 한 꼭 볼 생각이다. (스페인 영화임)

4. [어둠 속으로 사라지다 (Fade to black)] 1948년, 오손 웰스는 헤이워드와의 이혼 후 새출발을 위해 이탈리아에 찾아온다. 그런데 새로이 사귀게 된 여배우의 아버지가 촬영 중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웰스 감독은 이 살인 사건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는, 영화팬이라면 일단 눈이 번쩍 뜨일 스릴러다. 실제 영화를 봐야 확실히 말할 수 있겠지만, SF 팬에게는 대체역사로도 해석될 수 있을 설정이다. 감독은 올리버 파커.

5. [르네상스 (Renaissance)] 흑백 애니메이션. '2054년 파리는 모든 행동이 감시되며 녹화되는 미로 같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파리는 이제 거대 기업 아바론의 암영 아래 있게된 것이다. 한편, 미와 지성을 모두 갖춘 젊은 과학자 일로나가 납치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아바론은 유능하지만 문제 많기로 유명한 경찰 카라스에게 가능한 빨리 그녀를 구출하도록 의뢰한다....(후략)' 란다. '미와 지성을 모두 갖춘 젊은 과학자'가 찜찜하긴 하지만 애니메이션이고 2054년이니 보러 가야지. 2006년 ANSI 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그 외 세일란 감독의 [기후] (서울영화제 개막작), 소설이 원작인 [소립자], 감독 20명의 5분짜리 단편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 [사랑해, 파리], 유럽판 [트루먼 쇼]라고들 하는 [미스터 애버리지], [헤드윅] 감독으로 유명한 존 카메론 미첼의 [숏버스] 등도 (나는 그다지 볼 생각이 없지만) 관심을 기울일 만한 영화.

2006년 9월 21일 목요일

2006년 9월 21일 목요일 : 검은 고양이

오전에는 화실에서 베티 데이비스를 이어 그렸다. 니콜 키드먼을 그리고 싶었는데, 출력해 놓은 사진을 토요일에 집에 두고 나왔기 때문에 일단 잡지에서 골랐다. (이 사진은 오늘 가져 갔다.) 베티 데이비스도 좋지. 루비치 감독님 영화가 또 보고 싶구나.

화실 오가는 길에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매혹]을 읽었다.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의 삼각관계를 다룬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프리스트의 책 중에서도 이런 것이 출간되는 데에는 역시 기획자의 공이 크다. 읽으면서 새삼스레 감탄.

번역 하니 생각나는데, 내가 요즈음 (마음 속으로) 작성하고 있는 '미묘한 쾌감' 목록에 번역과 관련된 항목도 있다. '미묘한 쾌감'이란 주 활동의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활동에서 느끼는 오묘한 즐거움이다. 예를 들어, 검은 파스텔로 그림을 그릴 때는 지우개를 흰색 재료처럼 사용한다. 그런데 파스텔은 가루가 많이 나고, 특히 검은 파스텔은 검은색 건식 재료 중에서도 가장 짙기 때문에 작업을 하다 보면 지우개가 금방 새까맣게 된다. 그래서 평소에 지우개를 왼손에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열심히 밀어서 가루를 밀어 내는데, 이렇게 하면 새까맣던 지우개가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따끈따근해진다. 이게 바로 미묘한 쾌감!

번역의 경우, 치졸한 악당의 비열한 언사를 번역할 때 미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책을 읽을 때는 악당이 나오는 부분을 참 싫어해서 그냥 '이 사람은 지금 나쁜 말을 하고 있구나.' 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만 훑어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 중에도 타고난 리더가 있다면요?” 알드린이 물었다.
크렌셔가 코웃음 쳤다. “자폐인들이 리더라고? 농담 마시오. 그들에게는 리더가 될 자질이 없어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지.”
이런 악당의 말을 직접 쓰고 있으면, 참으로 희안하게도 기기묘묘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악당이 너무 거대하거나 최후의 승리자라면 재미 없겠지만, 나는 너무 강하고 잔인한 악당이 나오는 글은 맡지 않으므로(그냥 취향이다.)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다. (초고를 검토하기 위해 이런 부분을 다시 '읽을' 때에는 이런 미묘한 쾌감이 없다.)

화실 수업 후에는 종로 카페 뎀셀브즈에 가서 원고를 하다가, 오후 여덟 시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B영화의 제왕: 에드가 G. 울머 회고전' 프로그램인 [검은 고양이 (The Black cat, Edgar G. Ulmer | 1934ㅣ미국ㅣ65minㅣB&W)] 를 보았다.

상영 전에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울머의 작품 세계를 간단히 소개했다. [검은 고양이]에는 건축과 철학을 전공했던 울머의 건축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주인공이 유명한 건축가로 나온다.) 또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집어 넣은 성적 코드들과 카메라의 움직임에 주목해 보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이는 실제로 감상하기 전에 듣지 않았다면 놓쳤을 부분이다. 울머가 [검은 고양이]를 제작한 다음에 대형 스튜디오인 유니버셜을 떠났던 이유는 스크립트 걸과 연애를 하다가 간부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란다. (...) 울머는 B급 SF영화도 많이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호러만 상영되어 조금 아쉽다. 그래도 서울아트시네마가 아니라면 DVD상영이라 해도 30년대 공포영화를 어디 스크린에서 볼 수나 있겠어.

영화는 보러 가길 잘 했다 싶었다. 워낙 공포물을 싫어해서, 이번에는 'B급'이라는 타이틀, 30년대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짧은 러닝 타임을 보고 한 번 도전해 보자는 심정으로 갔는데, 검열이 있던 시대 작품이라 잔혹한 장면이 나오지 않아 편하게 보았다. 박사가 자신의 동족을 배신하고 아내를 죽였던 포울직을 묶어 놓고 '살갗을 벗겨 주겠다'고 한다. 놀래서 눈을 후딱 가렸다가, 조용하기에 살짝 내다 보니 찰흙 소조를 조각칼로 다듬는 것 같은 그림자가 잠깐 나오고 넘어간다.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의 삼각관계를 다룬 인상 깊은 작품으로, 잔인하다기보다는 무척 슬펐다. 과거 격전지/훈련장이었던 지하실의 구조와, 여자 시체를 세워 놓은 관들이 강렬했다. 번쩍이는 기하학적 건물이나 차가운 유리관이 음습하고 축축하게 느껴져 신기했다. 그리고 칼로프와 벨라 루고시 두 사람의 존재감이 굉장히 강해, 과장된 움직임에도 '과잉'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온 영화를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낮에 종로로 가는 버스 안에서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의 삼각관계를 다룬 인상 깊은 작품......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 15권을 읽었다. 이번에는 캐릭터 북, 메모지, 상자로 구성된 한정판도 나왔다. 메모지가 노다메가 치아키에게 달려갔다가 내던져지는 내용의 플립북(flipbook)이라, 아무래도 한 장씩 떼서 쓰지 못할 것 같다. 캐릭터 북이 파본이라서 한양문고에 전화했더니 11시 까지 영업한다기에, 영화를 본 다음 다시 홍대 입구에 가서 교환받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