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보통 그냥요, 라고 한다. 전공을 선택한 이유 중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도 있고, 현실적인 것도 있다. 그러나 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라 한다면 그 질문에는 분명한 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 때문이다. 나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 그 중에서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우주를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중학생 때 였던가, 뭘 하고 싶느냐는 질문에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사람들 안 만나고 공부만 하고 싶어요.'라고 답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난달 25일 오후 6시쯤 경남 창원시 용호동 대한적십자사 경남지사 건물 4층 총무과 「북한동포와 밥 한그릇 나눠먹기운동」 접수처에 30대 초반의 부부가 함께 들어섰다.
이들은 1백만원권 수표 10장이 들어있는 하얀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놓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위는 이랬다. 그날 오전 10시쯤 경남지사 총무과에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성금을 내고 싶다』며 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금액과 신분을 알려주면 감사서한이라도 보내겠다』고 말한 공인배(공인배·37)대리는 『1천만원을 송금하겠다』는 대답에 깜짝 놀랐다. 『신분을 알고 싶다』고 했으나 이 남자는 『마산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데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성금만 보내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적은 돈이 아니어서 은행계좌로 받는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공대리의 말에 이 남자는 『그러면 오후 5시 학교수업이 끝나면 찾아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 익명의 교사가 십 년 전 내 담임선생님이었다. 담당자는 마지막까지 익명을 요구한 선생님 몰래 기자를 불렀고, 실제 성금이 접수된지 한 달 쯤 지나서 선생님의 사진이 지역 신문에 나오고야 말았다. 당시 기자를 피해 여관에서 자기까지 하며 취재를 거부하던 선생님에게 기자가 "이런 기사를 보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일을 할 동기가 생긴다."고 설득했다는데, 선생님은 정말 이런 말에 순수한 선의로 설득될 만한 사람이었다. 지역 신문 기자는 약속을 어기고 선생님의 실명을 실었다. 선생님은 굉장히 당황하셨지만, 그 기자 덕분에 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상당히 바뀌었다.
강원도 출신인 선생님이 마산에서 교편을 잡기까지의 과정은 '극심한 가난과 불우한 환경 극복'이라는 테마로 5부작 인간극장을 거뜬히 만들 만 한 이야기이다. 선생님의 형편은 결코 넉넉치 못했고, 갓 태어난 아이까지 있었다. 천 만원이라는 돈이 있지도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 선생님이 그 처지에 그만큼 저금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깜짝 놀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그 돈을 남을 주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라고 하면 남들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을 꼬박꼬박 냈다. 의무봉사활동을 가서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삶을 보고 오면 충격과 막연한 무력감에 울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그 모든 일을 말하자면 바깥 세상 이야기로, 내가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남의 일로 생각했었다.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고말고. 대단해.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성금을 내는 것도 좋겠지. 지금은 이 용돈으로 사고 싶은 책도 다 못 사는걸. 언젠가 시간이 나면 봉사활동 같은 걸 제대로 해 보는 것도 좋겠지. 지금은 바빠서 어려워.
반 아이가 신문에서 오려온 기사를 보고 나는 말 그대로 '경악'했었다. TV나 연말 신문에 가끔 나오는 '그런' 사람이 내 생활 속에 줄곧 있어 왔다는 깨달음은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허물었다. 그 즈음 나는 질풍노도였다고 할 만한 사춘기의 끄트머리에 서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제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사가 나왔을 때는 마침 부모님이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서울에 올라와 계실 때였다. (나는 부모님이 부재중이시란 사실을 선생님에게 말씀드리지 않았었다. 타인의 일에 도통 관심이 없던 내가 선생님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지금까지도 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전화로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선생님과 대화할 기회가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일은 내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분에 대해 하나의 보기를 제시했다. 마치 안경을 바꾸어 낀 듯, 갑자기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처럼 생활 속에서 지금 당장 무언가를 실천하는 수많은 사람들, 행동이 필요한 사회의 많은 문제들, 내가 갖고 있는 것들 - 사람 한 명 한 명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개인을 둘러싼 사회가 내가 늘 관심을 갖고 있던 '별과 별 사이를 채우는 무엇' 만큼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찾아왔다. 책에서 수없이 읽으며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기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상이 펼쳐졌고, 일단 보기 시작한 이상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종교에 귀의하거나 즉시 진로를 바꾸지는 않았다. 내가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한 것은 이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고, 나는 점점 더 독실한 무신론자가 되고 있다. 갑자기 '원만한' 성격이 되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어려워하고, 평생 공부를 하며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삶이 상류에서 아주 조금만 꺾여도 하류에서는 처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 강과 같은 것이라면, 나는 그 꺾임이 일어났던 자리를 십 년 전 그 때로 정확히 짚을 수 있다.
도저히 전공이 성격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자괴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이도 저도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히거나 내가 받는 것의 백분의 일도 도로 내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자각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돌에 새기듯이 한 글자 한 글자 마음 속으로 읊는다. -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얼마 전에는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여겼던 사람으로부터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한 말을 듣고 무척 마음이 상했었다. 돌이켜 보니 아주 오래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때와 지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에 대해 그토록 잘 아는 사람이 내가 한 일을 잘못 판단한다면 그것은 그의 판단 실수라기보다는 내가 기대/예상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내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할 수 없는 일과 하지 않은 일, 투입과 산출을 정직하게 판단했던가. 똑바로 눈을 뜨고 나와 타인을 보았던가. 자문하다 보니 감정이 풀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우며 결심한 대로 살고 있는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고 있는가.